둔덕 앞에 선 아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직접 마주한 구조물은 정부 설명과 달리 거대한 ‘콘크리트 벽’에 가까웠다. 지난해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어머니를 잃은 이준화 씨는 사고 현장을 본 순간 상주(喪主) 대신 조사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른 유가족과 함께 레이저 측정기를 들고 현장을 돌며 사고 현장을 기록했다. 그렇게 1년간 모으고 써 내려간 자료만 2500여 장에 달한다.
22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 씨는 “정부가 자료를 제대로 공개하지도 않고 공식적인 사고 원인도 밝히지 않아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고 초기 국토교통부가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은 규정에 맞게 설치됐다’는 등 입장을 밝혔지만, 이 씨가 현장에서 확인한 사실은 정반대였다. 의문이 쌓이면서 그는 점차 정부 조사를 믿지 못하게 됐다.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1주기를 닷새 앞둔 24일 오후 전남 무안군 무안국제공항. 활주로 끝단에서 251m 떨어진 곳에 있는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을 지지하는 2m 높이 콘크리트 둔덕은 참사 피해를 키운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무안=뉴시스
179명이 세상을 떠난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 흘렀지만, 취재팀이 만난 유족 7명은 “조사 주체인 국토부 산하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의 소통이 일방적”이라고 지적했다. 박인욱 씨(69)는 당시 참사로 부인, 외동딸과 사위, 손자·손녀 등 가족 5명을 잃고 홀로 남겨졌다. 사고 이후 매일 공항을 지키는 박 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 활주로 끝에 놓인 로컬라이저를 찾는다. 혹여 바뀐 게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박 씨는 “투명한 자료 공개를 통해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공항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유족의 불신은 정부의 ‘깜깜이 조사’에서 비롯됐다. 특히 올 7월 정부의 엔진 정밀조사 결과 발표 추진 과정을 지켜보며 더욱 깊어졌다. 당시 사조위는 ‘조종사 과실’ 등을 중심으로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근거가 부실하다”는 유족의 반발에 언론 브리핑을 취소했다. 정부는 엔진 정밀 분석 보고서와 사고기 음성기록장치(CVR), 비행기록데이터(FDR) 등 정보도 유족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유족들은 “무엇이 밝혀졌고 무엇이 가려졌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옥의 1년’을 보냈다”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
조사가 제자리를 맴도는 사이 다른 공항의 위험도 그대로다. 무안공항처럼 항공기와 충돌할 경우 대형 참사를 유발할 수 있는 구조물이 방치된 전국 7개 공항 중 5곳은 여전히 시설 개선 공사를 마치지 못한 상태다.
● “원문 보고서 공개하라” 거리에 나선 유족들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로 숨진 둘째 딸 휘수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있는 윤순한 씨. 액자에는 “세상에 당신은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딸에게는 당신이 세상입니다. 부모라는 깊고 힘겨운 터널을 견뎌내 주셔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참사로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였던 딸을 잃은 윤순한 씨(59)는 ‘왜 사고가 났을까’라는 의문이 지난 1년간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시 큰 딸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윤 씨는 손이 떨려 운전대를 잡을수 없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착한 공항은 이미 울음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그 곳에서 윤 씨는 생전 처음으로 사돈을 만났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상견례를 마친 두 부모는 몇 날 며칠을 함께하며 사고 원인 규명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윤 씨는 사고가 나기 불과 2주 전 같은 비행기를 타고 태국 방콕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본인이 해당 비행기를 탔을 당시 착륙할 때도 덜컹거림이 심했다며 기체 결함을 의심했다. 24일 오후 광주 북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윤 씨는 “의구심을 풀어 줄 자료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으니 정부 조사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사조위는 7월 조사 내용 일부를 발표하려다 유족 제지 등을 이유로 취소했다. 당시 사조위가 발표하려던 내용에 “오른쪽 엔진 손상이 심했음에도, 조종사가 왼쪽 엔진을 껐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논란이 일었다. 특히 엔진 제조사인 미국 업체 측의 분석에만 의존해 기체 자체의 결함 가능성을 원천 배제하고 조종사 과실로 사고 원인을 몰아가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유족들이 엔진 결함 여부 등이 담긴 원문 보고서 공개를 요청했지만, 사조위는 영업 비밀과 국제 관례를 이유로 현재까지 묵묵부답이다.
2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무안 참사 희생자 유족인 고재승 씨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답답한 조사 과정 탓에 ‘거리의 투사’가 된 유족들도 있다.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인근에서 만난 고재승 씨(43)는 이날도 시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고로 부모를 잃은 고 씨는 “국가 책임이 걸린 시설물 문제나 조사 과정은 덮어둔 채 개인 과실만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근무했던 그는 올 7월부터 약 6개월 간 휴직 중이다. 국토부와 관련된 업무를 하는 일이 종종 생겨 심적 부담이 컸던 탓. 고 씨는 “사고 책임이 국토부에도 있는데 함께 일하니 ‘가해자’와 함께 일하는 기분이라 힘들었다”며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까지 거리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24일 오전 광주 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서득호 씨가 사고로 숨진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참사 이후 서득호 씨(43)의 삶은 ‘아버지의 삶’이 됐다. 서울에서 IT 업계에서 일하던 그는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광주로 내려왔다. 아버지가 손수 직접 지은 집, 타고 다니던 차, 손길이 묻은 물건들까지. 24일 오전 광주 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서 씨는 “‘아버지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난관을 헤쳐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1년간 정부의 대응을 지켜봐온 그는 사조위의 소통 방식을 지적했다. 서 씨는 “정부에서 사실을 은폐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자료 공개를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러한 정보 공개 문제 지적에 대해 국토부와 사조위는 블랙박스 기록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규정상 보안 유지 대상이고 보고서엔 영업 비밀이 포함돼있어 공개하기 어렵다는 입장으로 전해졌다.
●조사위 독립성 논란… 결론 발표 더 미뤄질 전망
유족들은 참사 직후부터 독립적인 조사 기구를 요구해 왔다. 참사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국토부 소속인 사조위의 ‘셀프 조사’는 믿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려에 따라 참사 초기 국회에서는 유족들의 의견에 따라 사조위를 국토부가 아니라 국무총리실 산하로 이관하는 내용의 ‘항공·철도 사고조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사고 1주년을 앞둔 10일에야 비로소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에는 현재 사조위 상임·비상임 위원의 임기를 종료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 과정이 역설적으로 속도에는 제동을 걸게 됐다. 조사 기구 재편과 위원 재선임, 조사 내용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당초 올해 말로 예상됐던 최종 사고 원인 결과 발표는 내년 하반기 이후로 밀리게 됐다.
23일 오후 광주 동구 전일빌딩의 한 카페에서 박근우 씨가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23일 오후 광주 동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근우 씨(23)는 “유족들이 원하는 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두 가지인데 그 길이 이렇게 멀고 험한 줄 몰랐다”며 “독립된 조사 기구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조사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순식간에 부모를 잃고 혼자 남겨진 박 씨는 결국 올해 4월 가족이 함께 살던 집을 정리했다. 그는 “부모님의 흔적을 볼 때마다 눈물이 차올랐다”며 “그곳에서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서 결국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무안공항으로 향하고 있다. 아직도 공항 한켠에 머물며 서로를 부여잡고 버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26일 전남 무안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천병현 씨가 사고 당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무안=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참사를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려는 이도 있다. 26일 전남 무안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천병현 씨(47)는 올해 사고로 숨진 형 생일에 지원금 등 일부를 고향인 전남 무안군에 기부했다. 천 씨는 “이달 26일이 형님 생일이었다”며 “작년에 형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 해 속상했다”고 말했다. 그는 “소액이라도 기부하며 형님을 계속 알리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재난이 발생했을 때 한 번에 통솔하고 조사할 수 있도록 관련 기구를 총리나 대통령 산하로 두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무안공항 참사 발생 1년이 지났지만 인천국제공항을 포함한 주요 공항들이 대형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활주로 내 위험 시설물을 여전히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안공항을 포함한 전국 5개 공항도 항공기와 충돌할 경우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 구조물 개선 공사를 완료하지 못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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