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전국 첫 통합돌봄 서비스 적용 충남 청양 고령자 아파트
2023년 고령자복지주택 개소… 의료-돌봄-요양 통합 서비스 제공
의료 취약지 한계 극복 ‘고육지책’… 작업치료실-재활운동실 등 갖추고
보건소-마트-터미널은 도보 거리… “우울증 앓았는데 친구 생겨 안심”
모든 의료 취약지에 짓기는 어려워… 퇴원 후 잠시 머물 ‘중간집’ 역할로
“자택 돌봄 받으며 안정적 노후를”
“오래 살다 보니 이런 호사를 다 누리네요. 자식들도 이제 걱정 덜었다고 좋아해요.”
17일 충남 청양군 ‘청양교월 고령자복지주택’에서 만난 양춘희 씨(92)는 치매 예방을 위한 색칠 놀이를 하며 밝게 웃었다.
양 씨는 2년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다. 주 5회 하루 3시간씩 치매 예방 교실에 참여한다. 컵 쌓기, 도형 맞추기 등 인지 능력 저하를 막는 수업을 듣는다. 건강 체조도 열심히 따라 한다. 양 씨는 “평생 학교에 다닌 적도 없는데, 여기 와서 처음 색연필을 잡아 봤다. 간호사들이 혈압, 당뇨도 수시로 검사하니 혼자 살 때보다 안심이 된다”고 했다.
2023년 9월 문을 연 이곳은 겉모습을 보면 여느 작은 아파트 단지와 비슷하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아파트형 고령자 주택에 통합돌봄 서비스를 접목한 곳이다. 총 127가구 중 117가구는 지역의 65세 이상 무주택 노인에게 임대했다. 방 10개는 퇴원 후 집으로 가기 전 머물 수 있는 ‘중간 집’으로 활용 중이다.
이곳은 노년 삶의 질을 좌우하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AIP)’, 노인들이 살던 곳에서 건강하게 늙고, 삶을 잘 마무리하는 것을 돕기 위한 주거 모델을 구현한 공간이다. 혼자 집에서 의료·돌봄 서비스를 기다려야 하는 고령자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복지주택의 운영 방식과 이곳에 거주하는 노인들의 생활을 살펴봤다.
● “난방비, 병원 갈 걱정 안 해도 돼 만족”
17일 청양교월 고령자복지주택 1층 정보화실에서 주민들이 증강현실(AR) 기기가 쏜 이미지를 좇는 작업치료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청양=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올 10월 기준 청양군 인구는 2만9294명. 충남 15개 지자체 중 최하위이고,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 중 215위 안팎을 오간다. 인구 42.4%(1만2413명)는 65세 이상 고령자다. 이 중 약 30%는 홀몸노인이다.
아픈 노인은 많지만 지역 의료는 열악하다. 보건소와 의료원의 중간 규모인 청양군보건의료원이 지역의 가장 큰 병원이다. 주민들은 인근 홍성의료원, 공주의료원 등으로 원정 진료를 다닌다. 그나마 이곳들도 대도시 대학병원에 비하면 열악하다.
청양군이 고령자복지주택을 만든 건 이런 의료 취약지의 한계를 의료·돌봄·요양의 ‘통합돌봄’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다. 한진희 청양군 통합돌봄팀장은 “지역 의료 현실에서 방문진료는 엄두도 못 낸다”며 “치매와 장애 노인, 홀몸노인, 만성질환을 겪는 어르신들이 요양병원, 요양원에 가지 않고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는 시설과 서비스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입지 선정 단계부터 고령자 편의가 최우선이었다. 복지주택은 보건의료원, 마트, 버스터미널 등이 모두 1km 이내에 있어 걸어서 다닐 수 있다. 거주자 김화수 씨(81)는 “혼자 집에 있을 땐 병원이 너무 멀었는데, 여기선 혼자 갈 수도 있고 간호사 도움도 받을 수 있다”며 만족해했다.
아파트 3∼10층에 있는 26㎡형 75가구, 36㎡형 42가구는 꽉 차 빈집이 없다. 월 임차료는 보증금에 따라 3만∼12만 원, 관리비는 전기료 포함 약 10만 원이다. 입주민의 절반가량인 기초생활수급자는 부담이 더 적다. 식사는 한 끼 3000원, 수급자는 무료다. 농촌 특성상 입주민들은 대부분 농가 주택에 살다 왔다. 처음에는 고층 주택을 낯설어했지만 금세 적응했다. 거주자 윤늠이 씨(86)는 “겨울이면 늘 난방비 걱정에 보일러도 못 틀고 살았는데, 여기선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 2층서 재활치료, 날마다 치매 예방 수업
청양교월 고령자복지주택은 입주자들의 신체 기능 향상에 중점을 뒀다. 2층 재활운동실에선 보행 훈련과 스트레칭 지도 등을 받을 수 있다.입주자들은 재활치료를 받으러 먼 병원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복지주택 2층에 작업치료실과 재활운동실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 체형과 보행 분석을 한 뒤 걷기 보조 레일을 따라 보행 훈련도 할 수 있다. 보행 기능이 떨어지면 신체 능력이 급격히 저하되는데, 걷기와 스트레칭으로 이를 예방한다. 청양군에 있는 충남도립대 작업치료학과와 협약을 맺어 졸업생 4명이 작업치료사로 재활을 돕고 있다.
노인들이 고립되지 않고 정서적 안정을 찾는 것도 공동주택의 강점이다. 치매 예방 교실에서 만난 최모 씨(84)는 몇 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혼자 지내며 우울증을 앓았다. 보건지소에선 최 씨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걱정할 정도였다. 다행히 2년 전 이곳에 입주하면서 상태가 크게 호전됐다. 최 씨는 “보건소에선 여럿이 같이 상담하니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여기선 치매 강사들과 일대일로 속 얘기도 하고, 가까운 친구와 언니도 생겨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했다.
● 초기 투자비용 한계, 다양한 주택 확산 필요
청양교월 고령자복지주택 2층의 체력단련실은 입주자뿐 아니라 지역 주민까지 하루 평균 40~50명이 이용한다.노년 삶의 만족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에이징 인 플레이스’ 정책이 일찍 자리 잡았다. 살던 곳에서 건강하게 늙고,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한다는 의미다. 2023년 정부 노인실태조사에서도 응답자의 87.2%는 현재 거주지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했다.
국내에서는 내년 3월부터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인 대상 ‘의료·요양·돌봄 통합지원 사업’이 시작된다. 요양병원 등 불필요한 사회적 입원을 줄이고, 자기 집에서 적절한 돌봄과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의사, 병의원이 부족해 방문 진료가 어려운 농어촌 지역에선 고령자 친화 공동생활 주택 보급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파트 형태의 고령자 복지주택 건설이 여의찮은 지역에선 소규모 주택 유형도 늘릴 필요가 있다. 국토교통부가 공급하는 고령자복지주택은 2023년 기준 전국 90곳에 9727호가 선정됐고, 현재 약 45%만 준공된 상황이다.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 급격히 늘리지 못하고 있다.
경기 안산시는 2021년부터 ‘케어안심주택’ 세 곳을 운영 중이다. 노후 주택을 매입해 허문 뒤 4층 규모의 고령자 친화 건물로 신축했다. 옥상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했고 전동 휠체어가 회전할 만큼 복도 폭을 넓혔다. 세면대 높이를 낮추고, 샤워실엔 앉을 수 있는 접이식 의자를 설치했다.
입주 기간은 최대 20년에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할 수 있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 임대료 25만 원만 내면 돼 인기가 높다. 정소우 안산시 통합돌봄과장은 “1층은 마을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해 건강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유치원과의 교류 행사도 한다. 입주자들이 고립되지 않고, 내 집처럼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 재택의료 보상 강화, 퇴원 후 재활 기능 확대해야
모든 의료 취약지 노인이 청양과 안산이 운영하는 형태의 공동주택에 거주하는 건 불가능하다. 고령층이 살던 집에서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서비스가 확대돼야 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수도권과 대도시에 밀집된 의료 서비스가 취약지까지 전달되도록 보상을 강화하는 것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혜진 분당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일본은 16km 반경에 의원이 없으면 병원급 의료기관이 방문 진료를 하도록 하고, 그만큼 높은 보상을 해 준다. 지방 의원들이 재택의료에 더 참여하도록 거리에 따른 보상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퇴원 후 6개월∼1년간 머물 수 있는 ‘중간집’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자호 국립교통재활병원 교수는 “퇴원해도 되지만 외래 재활치료를 받기 어려워 병원이나 요양병원에 입원하려는 환자가 적지 않다. 외래 재활 치료 접근성을 높여야 사회적 입원을 줄이고 통합돌봄도 정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애정 국민건강보험공단 통합지원 정책개발센터장은 “각 지자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연계해 특성화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시군구 단위뿐 아니라 광역 단위에서 재정 지원, 인력 배치 등을 큰 틀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