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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사진과 권력- 리좀(Rhizome) [고양이 눈썹]

입력 2022-01-24 10:11업데이트 2022-01-2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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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1

‘리좀’을 떠올리며 위 사진을 찍었습니다. 리좀. 조금 생경한 용어지요. 주로 창작이나 비평을 하는 문화인들이 씁니다. 리좀(Rhizome·근경·根莖)은 원래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땅속에서 옆으로 뻗어 번식을 하는 식물에 있죠. 대나무나 아카시아가 그러합니다.

사진출처=리서치게이트


위 그림에 붉게 칠해진 부분이 리좀입니다. 적절한 토양만 있다면 끝없이 수평으로 퍼지며 싹을 틔웁니다. 그림으로 보면 그냥 선으로 보이시겠지만 이 상황을 위에서 평면적으로 내려다보면 아래 그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리처드 기블렛, ‘균사체 리좀’


나무는 중심이 되는 줄기와 뿌리가 있는 경우가 많지만, 리좀 식물은 딱히 중심(Core)이라 할 만한 개체가 없죠. 그래서 탈중심적이고 수평적이며 개방적인 체계를 지닌 다중 개념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됩니다. 질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이 1980년 경부터 처음 인용한 단어입니다. 들뢰즈 책은 너무 어려워서 읽지 못한 저도 대략적인 개념은 알고 있을 정도로 리좀은 인문학계에선 여기저기 많이 쓰이는 용어입니다.

사진출처=구글이미지


리좀을 적극적으로 적용한 산업은 건축 같아요. 2006년 완공된 독일 촐페라인 경영디자인학교는 벽면 창문을 비대칭의 질서 없는 배열로 보여줍니다. 정형(定形) 없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냥 각기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며 존재합니다. 모두가 주인공인 동시에 모두가 조연입니다.

속초의 ‘설악산책’. 2층 카페 동편 벽면에 채광을 위해 창문을 뚫어 놓았는데, 이렇다할 원칙이 없습니다. 2021년 8월


경기 하남의 한 유치원. 사진출처= 카카오맵 로드뷰


리좀을 연상시키는 경북 상주의 ‘세 그루 집’. 리좀 식물을 뒤집어 놓은 것 같죠? 리좀은 따로 존재하는 다중 개념이면서도 뿌리줄기를 따라 연결되기도 합니다. 2020년 2월


정부세종청사도 비대칭이면서도 각 청사를 선으로 연결한 것이 리좀 개념을 부분 적용한 건축 디자인으로 보입니다. 동아일보DB


#2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동아일보DB

서울역 선별진료소. 2021년 12월


졸가리 없이 리좀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이유는 뉴스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리좀처럼 줄기가 없는 배열은 뉴스사진에선 보기 드뭅니다.

뉴스사진엔 위와 같은 구도의 사진이 많이 등장합니다.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를 보시면 중심(Core)이 명확하죠. 모든 사람의 시각이 가운데로 향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경선 당선인을 위해 참가자 전원이 들러리가 되는 앵들입니다. 권력이 창출된 순간을 시각적으로 나타내기에 딱 좋은 화면 구성 방법입니다. 행사 연출가도 이러한 사진을 목표로 무대를 설정했을 것입니다.

줄 서 있는 모습도 뉴스사진에 잘 맞는 앵글입니다. 구도가 단순하면서도 시작점과 끝이 명확한 선형(線形·linear) 패턴. 줄의 지향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사건의 목적을 정확하게 설명하기에 좋습니다.

중심(core) 패턴이나 선형 패턴 등의 정돈된 구도를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죠. 뉴스를 전해야 하는 기록사진이니 메시지의 통제도 정확해야 합니다. 자칫 엉뚱하게 해석되지 않도록, 기록자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알리려면 사진의 구도가 단순해야 합니다. 정형적인 패턴의 선과 점, 면으로 앵글을 통제해야 합니다. 사진 한 장에도 중심 소재가 있고 나머지는 주변부에서 중심을 돕는 배경 역할을 하죠. ‘주캐’와 ‘부캐’를 확실하게 나눠야 합니다. 사진이라는 2차원 평면 세계 안에도 소재끼리의 권력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3

우리 일상 공간에도 권력이 있습니다. 저희 막내 아이는 초등학생인데요, 아이들은 복도를 공유하는 똑같이 생긴 교실에 들어가 똑같이 생긴 책상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듣습니다. 전국의 거의 모든 학교 건물은 학생들을 통제하기 좋은 구조입니다. 통제하려는 학교측과 통제돼야 하는 학생들의 권력 관계가 공간에 그대로 드러나지요.

주말에 미술관, 박물관에 데려 가도 공간과 동선이 거의 일정합니다. 매표소 발권→메인 홀 진입→전시장 입장→바닥에 새겨진 화살표 따라 순서(서열)대로 관람→기념품 가게→퇴장…. 주최측이 관람객을 통제하기 좋은 배열입니다.

물론 통제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통제 없는 공간에서 아이를 풀어놓고 싶어지지요. 목적이 없는 리좀이 자연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아이를 자연에서 더 놀게 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설계자의 의도가 있는 인공 환경 패턴은 목적의식이 분명한 선과 면의 공간으로 구성되니까요.

#4

2021년 4월


배송된 로봇청소기 포장재가 언뜻 보기에 무질서한 모양새였는데요, 뒤집어 보니 리좀을 연상시켰습니다. 아이에게 주니 자기가 만든 찰흙 캐릭터를 놓고 잘 놉니다.

일본 가나자와 미술관 평면도


중앙홀과 메인 갤러리가 없는 일본 가나자와 미술관은 전시장이 일정한 배열 없이 들쭉날쭉입니다. 원형이라 앞뒤도 없고요. 관람객들의 동선도 딱히 정해지지 않는다고 하네요. / 사진출처 가나자와 미술관 홈페이지




신문사진이라고 리좀을 차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정보 전달보다는 시각적 즐거움을 앞세우는 사진은 과감하게 개념을 빌립니다. 색다른 화면구성을 시도하는 것도 저희 사진기자들의 의무입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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