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만큼 행복… 텅빈 대나무 사진 찍으며 ‘비움’ 실천하지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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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명인열전]<44> 사진가 라규채씨

라규채 씨의 작업실에는 그가 애지중지하는 카메라가 진열돼 있다. 그는 대나무와 실체가 보이지 않는 바람이 만나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을 앵글에 담아 ‘비움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라규채 씨의 작업실에는 그가 애지중지하는 카메라가 진열돼 있다. 그는 대나무와 실체가 보이지 않는 바람이 만나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을 앵글에 담아 ‘비움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곧고 푸른 대나무 숲에 바람이 일렁인다. 물감을 뿌려 그림을 그린 듯, 안갯속에서 헤매다 숲을 만난 듯, 하얀 여백에 푸르른 흔적이 바람을 부른다. 대숲에 이는 바람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오로라가 대지를 감싼 것처럼 기묘한 색채를 그려낸다. 흔히 대나무를 소재로 한 사진들은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고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이나 수묵화처럼 보이는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그의 작품은 다르다. 몽환적이면서 우주의 기운이 느껴진다. 최대한 카메라 셔터 속도를 늦춰 대상을 느리게 관찰하면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 ‘제3의 인생’ 사는 사진가


라규채 씨(57)는 대나무 사진으로 ‘비움(空)’이라는 독특한 미학을 추구하는 사진가다. ‘공무원 사진작가’로 명성을 얻었던 그는 2014년 12월 전남 담양군 대덕면장을 끝으로 명예퇴직하면서 30년 공직생활을 마쳤다. 정년이 6년이나 남아 있는 데다 ‘4급 서기관’ 승진이 유력했던 터라 다들 의아해했다. “퇴직 후를 통상 제2의 인생이라고 하지만 저는 제3의 인생이라고 여겼어요. 부모에게 기대는 30세까지를 제1의 인생, 가족 부양과 직장 생활에 매달리는 60세까지를 제2의 인생이라 한다면 진정한 나를 찾는 게 제3의 인생이죠. 이제 막 그 인생을 시작했는데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는 퇴직 후 보금자리를 고향인 대덕면 금산마을에 마련했다. 왼편에 비단을 펼친 듯 평활한 금산(해발 497m)과 멀리 만덕산(해발 575m)이 보이는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자리한 황토벽돌집이 그의 안식처이자 작업실이다. 21일 찾아간 그의 집은 그야말로 ‘꽃대궐’을 이뤘다. 정원에 핀 자줏빛 붓꽃과 붉은 꽃양귀비, 연분홍 앵초와 하얀 바람꽃, 빨간 금낭화 등이 유치원생 키만 한 아담한 돌담과 잘 어울렸다. 수령이 꽤 됐을 법한 모과나무, 매실나무, 감나무도 소담스러운 정원의 운치를 한껏 더해 주었다. “정원을 가꾸고 텃밭을 일구며 사는 일상의 소소함에서 행복의 가치를 찾고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임을 알게 됐어요. 이게 바로 앵글에 담고 싶은 세상입니다.” 사진가인 그에게서 철학자의 채취가 풍겼다.

그는 취미로 시작한 사진으로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30년 전 첫 월급으로 35mm 소형 카메라를 샀다. 전북 완주군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사진기를 갖는 것이 꿈이었다. 고교 시절 담임교사가 고급 사진기로 꽃과 나무를 앵글에 담는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해 처음엔 야생화에 몰입했다. 어린 시절 야산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들꽃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일요일이면 새벽 2, 3시에 배낭을 걸쳐 메고 집을 나섰어요. 지리산, 무등산 등 이름 모를 계곡을 헤매고 다니다가 원하던 꽃을 만났을 때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지요.”

1991년 담양군으로 옮기게 된 그는 1996년 군청 홍보실로 발령이 났다. 홍보 업무를 하면서 사진 촬영이 본업이 되다시피 했다. 지역 명물인 대나무를 비롯한 담양 구석구석에 그의 셔터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사진 이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국디지털대 문화예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광주대 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오직 사진만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아내에게는 ‘못 말리는 남편’이자 아이들에게는 ‘빵점짜리 아빠’였죠.” 라 씨는 “다행히 가족들이 이해해 줘 여기까지 왔다”며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어 명예퇴직을 했는데 이제는 아내와 자식들이 놀아주지 않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비운 만큼 아름다운 삶

그는 2006년부터 2년간 생채식을 하면서 또 다른 세상을 경험했다. 고기와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채소와 알곡, 물, 소금만으로 2년을 버텼다. 60kg이던 체중이 48kg으로 줄었다. 몸은 신기할 정도로 솜털처럼 가벼워 날아갈 듯했다. 머릿속은 새벽안개가 걷힌 가을 아침처럼 맑아졌다. 몸을 비우면서 ‘우주 속에 존재하는 물질의 본질이 텅 비어 있으며, 비어 있는 것을 곧 물질이다’라는 반야(般若)의 지혜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2009년 15일간의 미얀마 여행은 그에게 ‘비운 만큼 삶은 아름답다’는 삶의 진리를 일깨워줬다. 속도와 물질이 미덕인 현대사회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미얀마 사람들의 모습은 그가 추구하는 ‘공(空)의 세계’와 닿아 있었다. 그는 미얀마의 평화로운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 포토 에세이집 ‘하늘을 나는 새는 뼈 속까지 비운다’를 펴냈다. 이 책은 라 씨가 2013년 1월 광주에서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광주시에서 수지 여사에게 제가 펴낸 책을 선물을 주려는데 와 줄 수 있느냐고 해서 바로 달려갔어요. 책을 직접 전달했는데 가냘프면서도 단아한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비우는 삶이 주는 행복을 알게 되면서 그는 실체가 없는 바람을 끌어들여 대나무의 내면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대나무를 통해 형상과 중량이 존재하지 않는 바람을 매개로 댓잎이 사라짐과 드러남의 반복 속에서 우주의 본질인 공(空)을 얻고자 했다. 소설가 문순태 씨는 그의 작품집 서문에서 “세상을 빈(空) 것으로 보고 그 속에서 삶의 진정성을 찾아보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욕심이 가라앉고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의 작가적 태도는 고뇌에 찬 수행자처럼 진지하고 그래서 마치 영혼주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깨어난다”고 평했다. 그는 3년 전 수필가로도 등단했다. 39만6000m²(약 12만 평)에 달하는 담양읍 죽녹원의 대나무를 사진으로 표현하며 떠오른 영감을 글로 옮긴 작품으로 ‘현대문예’에 당선됐다.

그에게 ‘비움’은 영원한 화두다. 그동안 종교나 철학의 영역으로만 간주돼 왔던 ‘비움’을 사진으로 표현함으로써 선(禪)의 경지에 다다르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쓰는 작업이 곧 촬영입니다. 대나무를 찍지만 늘 대나무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내 사진을 보는 이들이 마음껏 상상하고 많은 걸 연상했으면 좋겠어요.”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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