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토론해 봅시다]민족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 입력 2008년 3월 31일 02시 57분


역사-문화 공유 엄연한 실체 vs 근대 민족국가가 만든 허구

○ 배경

14일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싸에서 시작된 티베트 독립 시위에서 유혈 참극이 발생했다. 티베트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라마교 승녀들의 시위를 중국이 무력 진압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에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중국의 강경 대응에 항의하고 있다. 올림픽을 앞둔 중국으로서는 국제사회의 압력도 외면하기 어렵지만, 티베트 독립 운동이 자칫 중국 내 소수민족들이 잇따라 분리 독립을 요구하게 되는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화 시대에도 민족은 여전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자본의 논리가 첨예하게 지배하는 국제질서 속에서도 자원민족주의, 경제민족주의가 공공연하게 횡행한다. 또 종교와 민족이 달라서 발생하는 민족 간 분쟁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프랑스 문필가 에르네스트 르낭이 “민족에는 영혼이 있다”고 했던 것처럼 언어·문화 등의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의지·선택 등의 주관적 요소도 민족 개념에선 중요하다. 복잡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 시대의 ‘민족’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민족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찬성 논거

민족은 혈연, 언어, 역사, 문화를 공유하고 ‘우린 동일하다’는 소속감을 가진 집단을 일컫는다. 만고불변의 고정된 개념도 아니지만, 그 실체적 존재를 부인할 수도 없다. 티베트 유혈 독립 시위도 인종, 역사, 종교적으로 구별된 ‘민족의 독립 운동’으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패권적인 강압은 오히려 민족적 차별성을 드러내면서 티베트에 독립의 명분만 쌓게 해줄 뿐이다. 민족의 차별성을 인정하면서 개방적인 태도로 접근할 때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민족적 갈등과 대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각국은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한 공세적 정책들을 앞 다퉈 취한다. 문화의 다양한 발전과 조화를 위해서도 다양한 민족을 인정하는 가운데 민족 문화를 인정하고 보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반대 논거

민족은 ‘실체 없는 허구’ 혹은 ‘상상 속 믿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모든 국가는 자국 중심의 역사 기술을 당연시한다. 그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생성됐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구 근대 민족 국가가 성립되고 나서 ‘민족(nation)’의 개념이 등장했다. 민족이란 개념을 내세우면서 사람들을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묶어 근대 국가의 존재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은 자기 민족, 자기 국가 내부의 갈등·투쟁·화해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면서 ‘민족적 논의’를 확대 재생산해 낸다고 볼 수 있다.

민족의 구성 요건을 살펴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순수한 종족’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종족에 입각한 민족 논의는 공상에 불과하다. 또 언어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남미 국가들이 스페인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같은 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은 선천적으로 정해져 내려오는 게 아니라, 늘 새롭게 결성되는 것이다. 변화 그 자체가 민족의 실체다.

○ 핵심 찌르기

민족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으로 출발하자. 서구 근대의 ‘nation’ 개념은 우리말로 ‘민족’과 ‘국가’로 번역이 가능하다. 서구 근대의 ‘nationalism’은 ‘근대국가(modern state)’로서 혈통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종족, 언어와 종교를 뛰어넘는 인위적 제도로서의 국가를 의미했다. 따라서 혈연적 성격이 강한 ‘민족’이란 개념은 그 속에 일정한 오류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역사에서도 ‘민족’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1920년대 이후 일이다. 그 전에 발표되었던 독립선언문에는 ‘평등한 공동체’라는 의미를 갖는 용어로서 ‘동포(同胞)’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모든 민족은 각기 고유한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민족의 ‘진짜’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역사학이나 인류학 혹은 유전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밝혀질 수 없는 난제임에 틀림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단일 민족 국가’는 있을 수 없다. 일정 부분 혼혈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집단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민족에 대해 개방성을 가질 때 그 민족도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와도 상통한다.

○ 논술 쓰기

민족과 관련한 글쓰기는 논술에서 고전적인 주제이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 문제와 관련해 ‘역사의 공유가 가능한가?’라는 흥미로운 질문도 가능하다. 세계화 시대에 ‘보편적 시민’과 ‘주체적 민족’ 중에서 어느 것을 중시해야 할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오늘날 민족주의는 분할과 통합의 양면을 동시에 지닌다. 분할의 속성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나 동유럽의 코소보 내전, 티베트 독립 운동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통합의 속성은 유럽연합(EU)의 예로 알 수 있다.

민족에 관한 폐쇄적이거나 감상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열린 시각에서 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된 두 개의 국가이면서도 ‘하나의 민족’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민족은 또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깊다.

○ 관련 문제

A, B 두 제시문(A=분할과 통합의 양면을 지니고 있는 세계, B=인간 역사는 기후 변화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 성질)은 인류 문명의 역사에 관해 각각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관점을 간략히 비교 분석하고, 그중 하나의 입장을 택하여 인류의 미래를 전망해 보시오.[경희대 2005학년도 정시 논술]

권윤호 경기 용인 풍덕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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