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공과 교수가 경제학 영어로 강의

  • 입력 2003년 10월 21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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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들에게 거시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고려대 현재천 교수. -김훈기기자
공대생들에게 거시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고려대 현재천 교수. -김훈기기자
고려대 화공생명공학과 강의실. 현재천 교수(59)가 영어로 강의를 시작한다.

“집에서 페인트칠할 때 붓을 담갔다 빼내면 페인트가 바닥에 떨어져 골치죠. 만일 색소를 구성하는 고분자물질을 적절하게 섞으면 붓을 꺼낼 때 페인트가 딱 끊어져요.”

여기까지는 보통의 공대 수업 분위기다. 그런데 갑자기 경제학 용어가 등장한다.

“이 기술로 상품을 만들고 국내총생산(GDP)을 높이려면 환율, 이자율, 주식, 채권의 국제금융시장 동향을 파악해야 합니다.”

강의 이름은 ‘공학과 거시경제학’. 이공계 학생에게는 신문 경제면에서나 접하던 낯선 용어들이 계속 이어진다. 30여명의 학과 4학년생과 대학원생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벌써 7년 전 전공선택 과목으로 지정됐고 동료 교수들도 자주 기웃거리는 이색 강의다. 내년에는 학점교환이 가능한 서울대 등 타대학에서도 찾아올 예정이다.

현 교수의 ‘학문’ 전공은 화학공학.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동양시멘트 부사장과 해외담당 사장으로 9년간 일하면서 ‘실무’ 전공으로 경제학을 체득했다.

“1985년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에 초빙교수로 갔을 때 2년간 거시경제 이론을 섭렵했죠. 기업을 이끈 현장경험이 있어 머리에 쏙쏙 들어왔어요.”

당시 41세의 경제학 만학도였던 그는 이공계 전공자들이 세계 재정과 금융 정책을 꿰고 있어야 기업과 국가의 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실제로 미국의 많은 최고경영자들이 이공계 출신인 동시에 거시경제학에 능통하다.

현 교수 강의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부가가치’. 페인트 얘기로 강의를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보통신이나 생명공학만이 고부가가치를 낳는 게 아니에요. 적당히 끈적거리는 페인트를 개발해 세계시장에 내놓으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죠.”

현 교수가 유변학(Rheology)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국내에 정착시켜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점성(액체)과 탄성(고체)을 동시에 갖춘 유체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학문으로, 피부에 잘 먹는 화장품을 개발하거나 입에 착착 달라붙는 초콜릿을 만드는 등 그 적용범위가 넓다.

현 교수는 1989년 한국유변학회를 설립한 주역이고, 현재 고려대 유변공정연구센터장, 한국·호주 유변학공동학술지 발행인이다. 그는 내년 여름 서울에서 열리는 제14회 국제유변학총회 준비위원장으로서 유변학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높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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