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나라]<1>선거 때마다 ‘아니면 말고’

동아일보 입력 2011-11-10 03:00수정 2011-11-1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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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판 뒤흔든 의혹들… 표 찍고나면 “거짓말” 흑색선전과 공약(空約). 한국 정치를 규정짓는 양대 요소다. 유권자들은 크고 작은 선거 때마다 승리를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아니면 말고’ 식의 공격을 해대거나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쏟아내는 정치권 인사들의 행태에 농락당한다.

내년 총선과 대선 시즌을 맞아 더욱 정교한 형태의 ‘거짓말 드라마’가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점점 폭발력 커지는 흑색선전

역대 대선에서 흑색선전이 가장 기승을 부렸던 것은 2002년 대선이다. 특히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겨냥해 쏟아진 △병풍 △한인옥 씨 10억 원 수수설 △20만 달러 수수설 등 선거 판세를 뒤흔든 ‘이회창 3대 의혹’은 그해 국정감사 등과 맞물리며 대선 직전까지 대부분의 선거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 측은 의혹이 잠잠해질 듯하면 국회 대정부질문 등에서 면책특권을 활용해 다시 의혹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이슈를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선거 전에 이렇다 할 법적 판단은 이뤄지지 못한 채 유권자들은 여야 간의 거짓말 공방과 진실 게임을 지켜보다 투표장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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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3대 의혹은 선거가 다 끝난 뒤에야 검찰 수사와 대법원 판결 등을 통해 사실무근으로 판명됐다.

2007년 대선에선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BBK 의혹’이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2008년 2월 BBK 특검은 이 대통령의 BBK 주가조작사건 관련 의혹이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일각에선 관련 의혹을 계속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선 주요 흑색선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산되고 심지어 특정 후보 지지자들 중 일부는 이를 가공해 추가 의혹을 양산하는 등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당시 야권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 대해 제기된 하버드대 로스쿨 학력 위조 의혹에 대해 하버드대가 박 후보의 로스쿨 객원연구원 경력을 확인하자마자 이 내용은 SNS를 거치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선 “한나라당은 내 학력도 위조했다고 주장해라” “나경원 후보가 서울대 법대 졸업한 것은 맞느냐”며 나 후보를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됐다. 나 후보의 ‘연회비 1억 원 피부과 이용 의혹’과 관련해선 SNS에 해당 피부과의 소재지와 내부 사진 등이 실시간으로 퍼지기도 했다.

내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흑색선전이 더 만연할 것이라는 우려는 그래서 나온다. 특히 ‘팩트’를 교묘히 왜곡하고 여기에 감성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SNS를 통해 순식간에 전파시키는 방식이 주류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 휴지조각 공약

선거를 앞두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가 당선 후 폐기하는 공약은 믿고 찍어준 유권자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점에서 흑색선전 못지않은 악성이다. 이 때문에 공약 불이행은 종종 정권 차원의 리더십 약화로 이어졌다. 공약 파기→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 하락→사회적 혼란 등 국정 환경 악화→국정운영 동력 상실→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 가속화라는 악순환이 정권마다 되풀이된 셈이다.

헌정사에서 공약 파기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된 것은 노태우 정부 때부터다. 1987년 대선에서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는 ‘대통령 임기 중 국민에게 신임을 다시 묻겠다’며 중간평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취임 후 의회 권력이 여소야대로 재편되자 1989년 3월 5공 비리와 5·18민주화운동 문제 처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조건으로 야당과의 비밀 합의를 통해 중간평가 공약을 파기했다.

1999년 7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내각제 개헌 철회도 헌정사에 기록될 대표적인 공약 파기 사례다.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부는 결국 2001년 9월 파경을 맞았다.

이명박 대통령도 자유롭지 못하다. 동남권 신공항 외에 ‘MB 노믹스’의 핵심 공약을 여러 이유로 지키지 못했다. 한반도 대운하와 공기업 민영화가 대표적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 ‘747’ 공약에 대해선 글로벌 경제상황을 감안할 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공약 파기의 이유는 상황 변경, 권력 투쟁 등 다양하다. 이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 철회만 해도 국민 통합 차원에서 마지못해 이뤄진 측면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선거 승리를 위해 덜컥 공약을 내놨다가 뒤늦게 철회하는 패턴이 반복될수록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쌓여간다는 사실이다.

○ 정치권의 ‘집단 거짓말’ 개헌

2007년 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4년 중임제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개헌 논의로 대선 판이 흔들릴 것을 우려한 여야는 이례적으로 한마음 한뜻이 됐다. 그해 4월 11일 한나라당 김형오, 열린우리당 장영달, 통합신당모임 최용규, 민주당 김효석, 민주노동당 권영길, 국민중심당 정진석 당시 원내대표가 ‘개헌은 18대 국회 초반에 처리한다’는 내용의 전격 합의문을 발표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비서실장은 개헌안 발의를 유보하며 “현 정부에서의 개헌이 어렵다면 다음 정부에서의 개헌을 차선의 방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를 위해 정치권의 확실한 담보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합의문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8대 국회 들어 합의문의 서명 당사자인 김형오 의원은 국회의장에 취임해 헌법연구자문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개헌 논의에 시동을 걸었지만 정치권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여권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이재오 전 특임장관이 나서 불씨를 다시 지폈지만 정략적 복선이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다른 정파의 의구심 속에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친박(친박근혜)계는 “대선을 겨냥한 친이(친이명박)계의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경계했다. 어찌됐든 18대 국회는 개헌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해명·사과하고 개헌 논의를 위한 최소한의 절차라도 밟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라는 지적이 많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인들이 흑색선전과 거짓말을 일삼는 이유는 그렇게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 선거 구조 때문”이라며 “거짓말을 하는 정치인과 그 세력에 대해서는 각종 선거에서 철저하게 응징할 수 있는 국민적 여론 수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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