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과거사위 “박정희 前대통령 언론장악 의도”

  • 입력 2005년 7월 23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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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들이 22일 오후 국정원에서 부일장학회 헌납과 경향신문 매각 등 과거 의혹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들이 22일 오후 국정원에서 부일장학회 헌납과 경향신문 매각 등 과거 의혹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1962년 부일장학회 헌납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와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1965년 경향신문 강제매각의 경우 김형욱(金炯旭)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그 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이 행사됐으며 종합적으로 볼 때 당시 박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추진, 실행된 것으로 판단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위원장 오충일·吳忠一)’는 22일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부일장학회 헌납 및 경향신문 매각에 따른 의혹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는 900여 권의 자료와 관련자 46명에 대한 면담을 통해 두 사건에 관한 의혹을 규명했다고 밝혔다.

김지태 씨가 1962년 작성한 부산문화방송국 기부승낙서(왼쪽)와 한국문화방송 기부승낙서(오른쪽)의 서명은 필적이 서로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밝혔다. 사진 제공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부일장학회 헌납=과거사위는 부일장학회 헌납과 관련해 “당시 중정 부산지부장 박모 씨가 ‘박정희 의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고 박 의장의 지시가 있기 전에 박 씨가 작성한 부산지부 실태보고서에는 김지태(金智泰) 사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며 “이 같은 정황에 미뤄 박 의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과거사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정 부산지부는 1962년 4월 20일경 귀국한 김 사장을 부정축재처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김 사장은 구속 상태에서 5월 25일 최고회의 법률고문이던 신직수(申稙秀) 씨에게 부일장학회 포기각서를 제출하고 6월 20일에는 고원증(高元增) 법무장관이 작성해 온 기부승낙서에 서명 날인했다.

과거사위는 “중정 부산지부는 부정축재 척결을 빙자해 김지태 씨에 대한 무리한 수사를 실시하는 등 국가 형벌권을 남용했고 수사과정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중정 본부가 재산 헌납을 유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특히 김 씨가 구속 상태에서 작성한 기부승낙서 등 문건 7건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문서감정 결과 기부승낙서의 서명은 김 사장 본인을 포함해 3명이 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기부승낙서 날짜도 ‘六月 二十日(유월 이십일)’에 한 획을 가필해 ‘三十日(삼십일)’로 변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김 씨가 풀려난 뒤 서명한 것처럼 날짜를 조작했음을 의미한다.

박정희 정권에 부산일보 주식을 빼앗긴 김지태 씨가 1962년 작성한 기부승낙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기부승낙서를 작성한 날짜 ‘六月 二十日(유월 이십일)’에 한 획이 가필돼 ‘六月 三十日(삼십일)’로 변조됐다”고 밝혔다. 현미경 투광 결과 ‘三’자의 위 두 획과 마지막 한 획의 농도가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 사진 제공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경향신문 매각=과거사위는 “1964년 경향신문의 대정부 비판 기사가 계속되자 경향신문 관계자 10명에 이어 이준구(李俊九) 사장도 구속됐다”며 “이 사장이 풀려난 뒤에도 논조 변화가 없자 김형욱 부장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경향신문에서 이준구가 손을 떼게 하라’는 지시를 받고 강제매각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이 사장의 구속 수사를 담당했던 중정의 길모 부국장은 이 사장의 부인인 홍연수(洪硏洙) 씨에게 “이준구를 사형시킨 후에 정신을 차리겠느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향신문은 그후 1966년 1월 경매에 부쳐졌고 박 대통령과 동향으로 단독 입찰한 김철호(金喆浩) 기아산업 사장에게 낙찰됐다. 그 과정에 김형욱 부장의 지시에 따라 대공활동국, 서울분실, 감찰실 등 중정 부서들이 경쟁적으로 이 사장 부부를 압박하는 등 매각에 개입했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김철호 사장은 1966년 4월 주식을 양도받은 후 박 대통령의 요구로 경영권은 1950년대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박찬현(朴瓚鉉) 제헌국회의원에게 넘기고 주식의 50%를 박 대통령에게 바쳤다. 이어 1969년에는 신진자동차 측에 남은 주식을 모두 양도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처리전망은…▼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2일 부일장학회 헌납과 경향신문 매각에 관한 진상을 발표함에 따라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처리될지 주목된다.

과거사위는 중앙정보부의 강압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 부일장학회 헌납에 대해 “국가에 헌납된 재산이 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았고 5·16장학회를 거쳐 정수장학회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유재산처럼 관리됐다”며 “정수장학회를 쇄신해야 하며 이를 위한 사회적 공론화의 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추진, 실행된 것으로 드러난 경향신문 매각에 대해선 “군사정권을 비판하다가 정권의 탄압을 받아 매각된 만큼 언론인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조치와 경향신문이 입은 손실을 보전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거사위는 이번 조사를 통해 국가기관의 위법성 등을 규명했을 뿐 재산권 분쟁이나 법적 책임의 문제는 과거사위의 소관사항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과거사위 민간위원인 이창호(李昌鎬) 경상대 교수는 “향후 어떤 구체적인 조치가 나와야 하는지는 국가기관과 사법기관의 몫”이라고 말했다.

안병욱(安秉旭) 민간위원 간사도 “과거사위의 조사결과가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라며 “원인무효소송 등의 법적 분쟁이 발생할 경우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국정원 김만복(金萬福) 기획조정실장은 “경향신문은 강제매각 때 청사가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었으나 매각 이후 문화방송과 합쳐지면서 중구 정동으로 옮겼고 이전할 당시 땅은 5·16장학회 소유였다”며 “소공동 부지를 경향신문에 돌려주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정치권 반응▼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22일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 강제헌납과 경향신문의 강제매각 관련 발표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을 요구했으나, 한나라당은 ‘박 대표 흠집내기’의 정략적 의도가 있다고 비난했다.

열린우리당 전병헌(田炳憲)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내고 “박 대표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그만뒀지만 실질적인 운영과 관리에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며 “박 대표는 과거의 강탈행위에 대해 고 김지태 사장과 유가족, 국민 앞에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민주당 유종필(柳鍾珌) 대변인은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및 경향신문 매각에 대해 적절한 사회적 보상과 시정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도 논평을 내고 “박 대표가 아버지의 부당한 행위를 깨끗이 정리하는 것이 도리”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이정현 부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을 통해 “국회를 통과한 과거사법에 의하지 않고 국정원이 일방적으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며 “이런 과거사 규명 작업이 ‘역사 바로 세우기’에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박 대표는 휴가 중이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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