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양섭/'부시 칠면조'는 장식용이었지만…

  • 입력 2003년 12월 7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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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추수감사절 칠면조 때문에 구설에 올랐다. 그가 바그다드 미군기지를 깜짝 방문해 장병들 앞에 양손으로 받쳐 들고 나타났던 황갈색의 먹음직한 칠면조가 장식용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

야당은 가짜를 진짜인 양 내보인 부시 대통령의 신뢰성까지 거론하며 공격했지만 정작 미국 국민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은 듯하다. 전쟁터에 자식을 내보낸 미국의 부모들은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명절에 자신들을 대신해 아들딸과 따뜻한 식사를 같이 한 대통령의 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2시간반에 걸친 ‘바그다드 체류작전’은 치밀한 각본에 따라 이뤄졌다. 백악관 참모진은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이 사실을 몰랐고, 부인 로라 여사도 며칠 전에야 통보받았다는 뒷이야기를 풀어 놓아 극적 효과를 높였다. 부시 대통령이 5월 1일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 호에서 비행복을 입은 채 전투기에서 내리며 이라크전 종전을 자축하는 한바탕 이벤트를 벌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시 참모진은 TV를 통한 이미지 조작에 능한 편이다. 지난해 9·11테러 1주년 당시 부시 대통령이 그라운드 제로 대신 뉴욕의 엘리스 섬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연설한 것도 고도의 상징 조작으로 볼 수 있다.

야당은 이에 대해 ‘주최측’의 의도대로 알리고 싶은 부분만을 부각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전형이라고 비난해 왔다. 하지만 부시 참모진으로서는 이라크 전후 처리 문제가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라크 문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획 홍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TV를 통한 대중적 호소에도 강한 편이다. 부시는 때로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던지며 연설을 연기처럼 해낸다. 하지만 2002년 1월 말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연두교서에서나 올해 3월 이라크 침공 연설 등 중요한 순간에는 강한 자신감과 함께 단호한 모습을 보여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집권세력의 프로파간다는 늘 있어 왔다. 하지만 아무리 TV나 인터넷 등 영상매체가 위력을 발휘하는 감성정치의 시대라 하더라도 ‘포장’만으로 나라를 이끄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미디어를 이용할 줄 아는 타고난 감각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미국 국민 61%(내셔널 애넌버그 일렉션 서베이 2일 조사)가 그의 직무수행에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9·11테러라는 초유의 위기상황에서는 내편 네편 없이 함께 아파하고 설득하면서 때로는 지도자로서의 결단력도 보여줬다.

요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앞에는 활력이 떨어진 경제, 측근 비리 의혹에 대한 특검, 부안지역 핵 폐기장 문제, 이라크 파병 및 북한 핵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해결하기 쉽지 않은 과제들이 놓여 있다. 노 대통령에게 부시 대통령과 같은 쇼맨십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모든 현안을 너무 논리적으로만 접근한다는 비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때로는 ‘냉철한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이 난제를 푸는 첩경일 때가 있다.

부시 대통령이 내편 앞에서 장식용 칠면조를 내보였다면, 노 대통령은 내편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진짜 칠면조 고기를 썰어내는 심정으로 국정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

윤양섭 국제부 차장 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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