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이회창 총리 전격사퇴」 파동

  • 입력 1998년 1월 25일 19시 14분


94년 4월 23일. 조간신문들이 일제히 ‘이회창(李會昌)총리 전격 사퇴’를 1면 머릿기사로 올린 날이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 취임 직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핵심실무를 맡았던 S씨는 이날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선배의 보고서가 생각나 다시 읽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썼습니까.” 현철씨가 말한 ‘보고서’는 이회창씨에 관한 비공식 보고서. 2월초 김영삼대통령당선자의 조각(組閣)인선 실무팀은 새 정부 감사원장 후보로 이회창 전중앙선관위원장, 김진우(金鎭佑)헌법재판관, 배명인(裵命仁)전안기부장 등을 최종후보 물망에 올렸다. 이것을 안 현철씨는 대선 때부터 자신을 도운 S씨에게 각 후보들에 대한 검토보고를 부탁했었다.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 인물』▼ S씨의 증언. “누구를 적임자로 올렸는지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회창씨에 대해 ‘일체의 공직을 맡겨서는 안되는 인물’로 보고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회창씨에 관한 보고서만도 대략 6,7페이지 정도였습니다. 첫째, 중앙선관위원장 시절 노태우(盧泰愚)대통령에게 대들었던 행동을 김대통령에게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둘째는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 인물이다. 그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노태우대통령에게 대들었던 행동’이란 88년 서울 영등포 재선거 때 이회창중앙선관위원장이 노대통령에게 선거법 위반을 경고한 ‘사건’. 현철씨는 ‘이회창 사퇴파동’이 터지자 바로 이 보고서를 다시 꺼내보며 “이제보니 정말 정확했다”고 감탄한 것이다. 김영삼과 이회창, 이회창과 김영삼. 주돈식(朱燉植)전청와대정무수석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악연(惡緣)’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냥 악연도 아니고 ‘이용과 역이용의 악연’이라는 것이다. 정말 악연이라면 어디서부터 시작된 악연일까.물론 첫 만남부터 악연일 수는 없었다. 김대통령은 문민정부 초대내각을 빛내기 위해 이회창씨의 ‘대쪽 이미지’가 필요했다. 김대통령은 이회창씨를 설득, 감사원장으로 내정한 직후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았으면 나오지 않았을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마치 ‘잠룡(潛龍)’을 깨워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듯한 ‘과시’였다. 93년 7월 이회창감사원장이 ‘성역은 없다’며 율곡비리문제로 전직 대통령들을 조사할 때도 김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회창감사원장은 대법원장 감인데도 좋은 길을 버리고 (감사원장을 맡아달라는) 나의 요청을 받아줘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감사원장 역시 이에 “김대통령을 가깝게 접촉하고 보니 과거의 대통령들과 비교해 굉장히 민주적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화답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치하와 이회창씨의 화답은 점점 서로의 이면갈등을 분식(粉飾)하기 위한 ‘수사(修辭)’로 변해갔다. 얼마후엔 그마저도 사라졌지만…. ‘이회창 맨’의 직격탄. “국정을 책임진 김대통령 입장에서는 이회창씨의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회창씨를 매우 거북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김대통령이 없었다면 이회창씨는 이 나라의 존경받는 대법원장이 됐을 겁니다. 운명의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김대통령은 개혁정책을 하기 위해 이회창씨를 감사원장에 앉혔고, 갈등의 싹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회창감사원장은 율곡감사 때 전직 대통령을 조사하면서 ‘성역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게 당연한 입장 아닙니까. 그러나 김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같아 기분나빴던 겁니다. 상도동 가신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회창은 납득하기 어려운 껄끄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 김대통령은 그해 9월초 김덕주(金德柱)대법원장이 재산공개 파동의 와중에 돌연 물러나자 ‘이회창 대법원장’을 생각했다. 김대통령의 ‘오랜 지인(知人)’이 전하는 당시 상황.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김대통령이 이회창씨를 후임 대법원장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는 겁니다. 이미 이회창씨에게 언질을 줬다면서요. 나는 이회창씨를 대법원장에 앉히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회창이라는 사람은 대법관으로 있을 때 국가보안법사건에 소수의견을 냈던 사람이다. 색깔이 의심스러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대법원장으로 앉히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김대통령도 놀라는 표정이더군요.” ‘오랜 지인’의 반대가 ‘이회창 대법원장’을 좌절시켰는지는 단정키 어렵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이회창감사원장을 대법원장에 앉히려 한 배경에는 ‘법(法)대로 감사원장’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 것 같다는 게 이회창맨들의 생각이다. 이즈음 급격히 파고(波高)를 높여가던 우루과이라운드(UR) 격랑(激浪)은 두사람의 관계를 다시 ‘이용과 역이용’ 관계로 밀어넣었다. UR협상이 코앞에 닥치면서 쌀시장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국민의 분노가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김대통령은 93년 12월 16일 황인성(黃寅性)총리를 전격 경질하고 ‘이회창총리’카드를 내놓았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박관용(朴寬用)의원의 기억. “이회창총리의 전격 발탁은 UR협상에 따른 국민적 저항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것입니다. UR문제는 김대통령 취임 이후 국민이 처음으로 ‘들고 일어난 사건’이었어요. 불이 더 번지기 전에 조기진화를 해야 했던 거죠. 그래서 당시 대쪽 이미지로 인기를 얻고 있던 이회창감사원장을 발탁한 겁니다.” ‘이용과 역이용’의 필요가 이회창총리를 탄생시켰지만 두 사람의 ‘악연’은 이 때부터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징조는 총리 취임 직후부터 나타났다. ▼『실세-허세 장관 따로 없다』▼ 이회창총리는 개각 후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다. “실세장관이니 허세장관이니 하는데 우리 모두 실세가 돼야 합니다.” 새로 입각한 최형우(崔炯佑)내무 김우석(金佑錫)건설 서청원(徐淸源)정무장관 등 ‘민주계 실세장관’들이 지켜보는 자리였다. 이총리의 ‘실세 내각론’은 헌법상 보장된 총리의 권한을 찾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청와대와 총리실 주변에 긴장감이 높아져갔다. 이총리 재임기간은 불과 4개월. 그러나 이총리의 관변단체에 대한 정부지원 중단지시, 전남 영산강 오염사건, 김양배(金良培)농수산부장관의 전격 해임, 그리고 문제의 통일안보조정회의사건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전선(戰線)이 형성됐다. 결정적인 사건은 통일안보조정회의 신설문제. 김대통령 취임 직후인 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핵문제와 남북문제는 좀처럼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았고, 여론은 정부정책이 오락가락한다고 몰아붙였다. 박관용비서실장이 김대통령에게 긴급 건의를 올렸다. “각하, 사실과는 다르지만 대북정책을 놓고 정부내에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으니 통일안보조정회의같은 기구를 만들어 사전 조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대통령이 ‘좋은 생각’이라며 OK사인을 주자 박실장은 곧바로 정종욱(鄭鍾旭)외교안보수석을 찾았다. “미국의 국가안보회의같은 안보조정기구를 만들어 봅시다.” 그 결과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가 대통령자문기구로 신설되자 이총리측에서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총리실에서도 멤버로 들어가야 한다.” 통일안보조정회의 멤버는 통일부총리 외무 국방장관 안기부장 청와대비서실장 외교안보수석. 청와대비서실장을 빼면 종전에 총리가 주재하는 고위전략회의 멤버였다. 박관용실장의 회고. “이미 대통령 재가까지 났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했더니 이총리가 주례보고 때 대통령에게 직접 ‘총리비서실장을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게 해달라’고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흥주실장이 매번 참석해 회의내용을 모두 적어 총리에게 보고했습니다. 이총리가 불만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총리는 그러나 첫 통일안보조정회의(94년 4월8일)가 열린 직후 이영덕(李榮德)통일부총리와 한승주(韓昇洲)외무장관을 불렀다. “통일안보조정회의에 회부된 안건은 사전에 총리의 승인을 받아 시행하라.” 청와대가 발끈하고 나섰다. 언론도 청와대와 이총리의 갈등에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다. 4월21일 국무회의. 이총리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안건을 처리한 뒤 입을 열었다. 이총리〓북한핵문제도 있고하니 오늘은 시국에 관한 얘기나 합시다. 남재희(南載熙)노동부장관이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견을 좀 말씀해 보시죠. 남장관〓(처음있는 일이라 의아해하며)북한핵문제는 대미(對美)관계가 얽힌 문제인 만큼 외무장관을 단일창구로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그후 청와대비서실에서 중심이 돼 (통일안보조정)회의를 하던데 그것은 혼선 아닙니까. 통일부총리가 하든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가동하든지 해야 순리라고 봅니다. 국무위원인 내가 혼선을 일으키고 있는데 일반국민은 어떻겠습니까. 이총리〓(다른 국무위원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내각 권한」 역설에 YS 격노▼ 이총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4월22일 주례보고에서 다시 ‘내각의 권한’을 역설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격노했다. 박관용실장의 증언. “안그래도 총리의 헌법상 권한 운운하며 대통령의 권한까지 침해하려는 것에 화가 나있던 김대통령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권력암투설이 나돈 것도 그무렵이었다. 민주계 중진의 증언. “이총리 사퇴 직후 김대통령은 경기고 출신 모장관을 청와대로 불렀습니다. 김대통령은 그 장관이 자리에 앉자마자 ‘당신이 이회창이 참모장이라며…’라고 고함을 지르더라는 겁니다.” 김대통령은 이총리가 겉으로는 총리와 내각의 권한을 내세우며 물밑으로는 ‘차기(次期)’를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취임 직후만 해도 90%를 오르내리던 김대통령의 지지도는 이후 50% 이하로 급전직하했고 거꾸로 이회창씨의 인기는 35%로 치솟았다. 오히려 이회창의 ‘차기 발판’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그러나 총리사퇴 파동은 이후 전개되는 ‘이용과 역이용의 악연’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김창혁기자〉 ▼감사원장 누가 추천했나?▼ 애초 이회창(李會昌)감사원장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게 천거한 사람은 누구일까.물론 김대통령은 88년 동해시 보궐선거 때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자신에게 ‘경고서한’을 보낸 ‘대쪽 중앙선관위원장 이회창’을 몰랐을 리 없다. 대통령 당선 직후에도 여러 사람이 이회창씨를 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문민정부 초대 환경처장관으로 기용된 황산성(黃山城)변호사의 ‘천거설’이 많이 나돌았다. 93년 설날. 김당선자는 황변호사 부부와 식사를 했다. 김당선자〓감사원장을 누구로 했으면 좋겠습니까. 황변호사〓법을 아는 사람이 해야죠. 이회창대법관은 인품이 훌륭하고 대쪽같은 분입니다. 김당선자〓(고개를 끄덕이며)좋은 얘기가 많더군요. 황변호사는 나중에 다른 사람 이름이 감사원장 후보로 거론되자 김당선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회창씨가 제일 낫습니다. 딴 사람 생각하지 마시고 이회창씨로 하십시오”라며 ‘운동’을 하기도 했다. 황변호사의 기억. “그러면서도 나는 이회창씨가 감사원장을 수락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정자 발표가 나옵디다. 사실 대법원장이 되셔야 할 분인데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법원에 찾아가 ‘사실은 제가 김당선자에게 말씀드렸습니다’라고 했더니 ‘범인이 여기 있었구만’이라며 웃더군요.” 그러나 황변호사는 이번 대선 때 이회창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회창후보가 옛날에 내가 알던 이회창대법관이 아니더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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