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李仁濟) 국민신당후보는 9일 하루 동안 대구 시내 시장통만 5군데를 누비며 「번개유세」를 하느라 발이 부르틀 지경이었다.
이후보의 이날 일과는 새벽시장을 공략하던 여느 때와는 다르게 시작됐다. 그는 새벽 5시반경 대구 복천동 성보재활원의 구석방에서 눈을 떴다. 간단히 세수를 한 뒤 재활원생 중 마비증세가 가장 심한 은빈군(11)을 안아 휠체어에 태운 뒤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 정성들여 얼굴과 손 발을 닦아주었다.
옆에서 기웃거리던 원생 4,5명도 불러 세수를 시킨 뒤 식당에서 원생들과 아침식사를 했다.
이후보는 원생중 최고령인 조영기씨(28·방송대2년)가 시를 잘 쓴다는 말을 듣고 『아름다운 생명의 시를 많이 쓰라.나중에 시집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격려했다. 원생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몇몇은 이후보에게 사인을 해달라며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이후보는 이들에게 일일이 「대통령후보 이인제」라고 사인해준 뒤 『모두 하느님이 내려준 귀한 재주를 잘 살리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로 전용 유세버스에 올라 대구지역 119봉사대소속 택시운전사 20여명이 기다리던 따로국밥집으로 이동했다. 그는 택시운전사들과 두번째 아침밥을 먹으며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겠다』고 역설했다.
다음 행선지는 대구역사.이후보는 출근길의 대구시민들에게 『젊고 패기있는 「일꾼 대통령」에게 힘을 모아달라』며 지지를 호소한 뒤 단골 거리유세장인 번개시장으로 옮겼다.그는 힘이 솟는 듯 활기찬 발걸음으로 시장통을 누볐다. 대구 가스폭파사고 위령탑 참배차 상인역으로 가기 위해 대구역에서 지하철을 탄 시간이 오전9시. 이후보는 상인역에서 내린 뒤 영남중고교를 둘러보았다. 그가 예정에 없던 곳으로 발길을 옮긴 이유는 95년 4월 대구 지하철 폭파사고 당시 이 학교에서만 43명이 숨졌던 사실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위령탑에서 잠시 희생자들을 추모한 뒤 유세버스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그에게는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오전10시쯤 주로 6.25참전용사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대구 보훈병원에 도착했다. 8일 저녁 함께 대구로 온 박찬종고문도 잇따라 도착, 이후보와 함께 칠순에 가까운 환자들을 위로했다.
이어 달성구에 있는 성당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보는 시장통을 다닐 때마다 유난히 배추가게 앞에서 멈출 때가 많다. 그의 학창시절 별명인 「배추머리」가 생각나서다. 시장에서 빠져나오자 큰 길가에서 갑자기 『이인제, 이인제』하는 연호가 터져 나왔다. 부산을 출발, 대구에 도착한 국민신당 청년본부 소속 자전거유세단원 20여명이었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쌓인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듯했다.
정치인에게 최고의 활력제는 연호와 박수소리. 에너지를 재충전한 이후보는 총총걸음으로 대구대 계명대, 대구지역 지구당 합동창당대회, 서문시장 칠성시장 등을 찾아 강행군을 계속했다.
〈대구〓최영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