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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인자한 송해 선생님, 무대엔 엄격… 장윤정도 늦었다가 야단맞아”[이진구 기자의 對話]

입력 2022-06-27 03:00업데이트 2022-07-0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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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송해와 함께한
신재동 전국노래자랑 악단장
21일 전국노래자랑 녹화 무대에서 고 송해 선생님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는 신재동 악단장(왼쪽). 그는 “선생님은 늘 녹화 내내 한 번도 앉지 않고 몸을 꼿꼿이 세우고 무대를 지켜봤다”며 “그 모습이 마치 스스로 강하게 살아가려고 버티는 것처럼 보여 짠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남해=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이진구 기자
《“전구∼욱 노래자랑! 빰빰빰 빰 빰 빰∼ 빰 ♬ 빠빠빠∼ 딩동댕! 전국에 계신 독자 여러분,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도 지구촌 곳곳에서 새로운 희망 속에 열심히 살아가시는 해외 우리 동포 여러분들, 해외 근로인 여러분들, 그리고 해외 자원봉사원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송해 선생님과 30년간 전국노래자랑을 함께한 신재동 악단장을 모시고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푸근한 인상과 달리 선생님께서 야단도 많이 치셨다고요.

“일에는 0.0001%도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으셨거든요. 한없이 인자한 얼굴과 달리 가슴속에는 늘 넘치는 에너지가 있으셨어요. 그래서 당신이 보기에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이 벌어지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지요. 초대가수들이 리허설에 늦게 오거나, 건방을 떨거나 하면 된통 혼났으니까요.” (혹시 누가….) “하하하, 가수 장윤정 씨도 초창기 때 조금 늦었다가 호되게 야단맞은 적이 있고… 한두 명이 아니에요. 그런데 뒤끝은 전혀 없으세요. 5분도 안 지나서 바로 풀어지시니까. 전국노래자랑에는 선생님의 그런 생각과 애정이 곳곳에 배어 있어요. 일단 시작하면 거의 NG 없이 생방송처럼 녹화하는 것도 그렇지요.”

―출연자가 일반인인데 가능합니까.

“선생님 지론인데… 몇천 명이 한창 흥겨워서 달아오르고 있는데 다시 찍자고 중간에 끊으면 김이 빠져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웬만하면 중간에 끊고 다시 찍는 일이 거의 없어요.” (예측 못 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 잘 타고 넘어가는 게 선생님 실력이죠. 예전에 한 양봉업자가 온몸에 벌을 붙이고 무대에 선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분이 내려간 뒤에도 꽤 많은 벌들이 무대에 날아다니는 거예요. 송 선생님은 방충망 같은 걸 쓰고 진행했고, 뒤이은 출연자는 벌이 입에 들어가서 본의 아니게 ‘땡’을 받았는데도 벌을 잡기 위해 끊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녹화가 시작되면 절대 자리에 앉지도 않아요.”

―녹화가 3시간 넘게 걸린다던데요.

신재동 악단장이 10일 고 송해 노제에서 전국노래자랑 시그널 곡을 지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리허설 때는 대본을 정리해야 하니까 앉지만 일단 녹화가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몸을 똑바로 세우고 무대를 지켜보세요. 비가 와도 다 맞고요.” (출연자가 노래할 때는 앉아도 되지 않습니까? 화면에 나오는 것도 아닌데요.) “젊을 적 악극단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인 것 같아요. 관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사실 50, 60대도 서서 3시간 넘게 있기는 힘들어요. 리허설부터 하면 7∼8시간이나 걸리는데, 요즘 같은 무더위에 야외에서 진행하면 더 힘들지요. 그걸 90세가 넘어서도 하셨으니…. 체력만 좋으신 게 아니에요. 정의감도 불타셨지요.”

―전국노래자랑에서도 불의한 일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까.

“예전에 충청도 어디였는데… 리허설이 한창인데 공무원들이 관객석 맨 앞자리에 의자를 놓고 있더라고요. 군수, 군의원들 앉을 자리라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선생님이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당장 치워라. 앉고 싶으면 저 뒤에 아무 데나 앉아라. 전국노래자랑에는 특석이 없다’고 노발대발 소리쳐서 뺐지요.”

―우리 정서상 과거에는 그런 행태나 요구가 꽤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1992년부터 참여했는데, 그때만 해도 공무원들이 맨 앞자리 가운데를 끈으로 쳐서 귀빈석을 만들었어요. 선생님은 그런 모습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게 쌓였다가 그날 터진 거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저런 짓을 하고 있느냐’면서…. 그 뒤로 전국노래자랑은 지자체장이든, 지역 국회의원이든, 유지든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아요. 지역 행사다 보니 지자체장들이 지역을 소개하고 무대에서 노래 한 곡 부르게는 해줘요. 하지만 실제 방송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은 편집하고 내보내지 않지요. 선생님은 저희들이 못 받은 월급을 대신 나서서 받아주기도 했어요.”

―월급이 안 나오다니요.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프로그램이 한 8주 정도 결방됐어요. 워낙 사회적으로 슬픔이 큰 사건이다 보니 흥겹게 노래 부르는 프로는 내보내기 어려웠던 거죠. 그래서 그 기간 동안 저를 포함해서 악단 단원들 월급이 안 나왔는데 선생님이 대신 회사와 담판 짓고 받아주셨어요.”

―선생님이 중간에 잠시 하차하신 건 왜 그런 겁니까.

“1994년 4월경인가? 경북 영천이었는데… 녹화 날 아침에 그냥 짐 싸서 올라가셨어요. 담당 PD와 프로그램을 놓고 의견 충돌이 잦았는데 선생님은 선생님의 생각이 있고, 또 PD는 너무 자기 고집이 강한 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다 보니 녹화 때마다 서로 쌓인 거죠. 녹화 전날부터 ‘안 한다. 안 한다’ 하셨는데 ‘그럼 하지 말라고 해’ 뭐 이런 말까지 나오고…. 설마 진짜 가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아요.”

―진행은 누가….

“관객이 몇천 명이 왔는데 안 할 수는 없잖아요. 급하게 초대가수로 왔던 현철 씨가 다른 사람 한 명이랑 MC를 봤어요. 그렇게 대충 찍기는 했는데… 결국 실제 방송으로는 못 나갔어요.” (못 나가다니요?) “그 녹화는 방송을 못 내보내고 나중에 다시 가서 제대로 찍어서 내보낸 거죠. 그 뒤로 김선동 아나운서가 진행을 했는데, 와… 진짜 전국에서 ‘송해를 돌려 달라’는 항의가 빗발쳤어요. 결국 그해 10월에 복귀하셨지요. 그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받으셨지만 정작 선생님 자신은 외로워 보일 때가 많았어요. 저는 선생님이 술을 그렇게 드신 것도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요.”

―녹화 전날 새벽까지 드신다는 얘기는 워낙 유명합니다만….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예요. 보통 버스 앞에서 세 번째 줄 정도에 앉으시는데 만남의 광장쯤 오면 뒤를 슥 한번 보세요. 눈이 마주치면 말하나 마나 내리라는 뜻이죠. 그때 작곡가 이호섭(현 전국노래자랑 진행자)이 있으면 같이 내리고, 아니면 저만 내리는데 양재 쪽에 자주 가시는 돼지갈비 집에 가서 또 마셔요. 큰 컵에 20∼25도나 되는 빨간 뚜껑 소주를 부어 드시는데, 식사는 거의 안 하시고 안주만 아주 조금 드셨지요. 그렇게 밤새 마시고 택시를 태워 보내드리는데 그 뒷모습이 너무 쓸쓸하고 안타까워 보일 때가 많았어요. 가족들 다 두고 홀로 내려 오신 데다 사고로 아들도 잃으셨으니….”

―늘 버스로 함께 다니셨다고요.

“버스가 녹화 전날 오전 10시에 여의도에서 출발해요. 선생님은 늘 오전 7시쯤 먼저 오셔서 스태프와 함께 아침을 먹고 차 한잔하고 얘기하다가 타셨지요. 댁이 경부고속도로를 타는 양재동 근처라 저희가 가는 길에 들르겠다고 해도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어요.”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차 문제를 많이 고민하셨습니까.

“최근 몇 달간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마음과 달리 몸이 힘드셨거든요. 전국노래자랑이 코로나19 때문에 현장 녹화를 못 하고 과거 방송을 편집해 내보내는 스페셜 편으로 방송됐는데 힘드시면 스튜디오에 못 나오시기도 했으니까요.” (많이 안 좋으셨습니까.) “돌아가시기 2∼3주 전에는 살이 다 빠지셔서… 예전 모습이 거의 없으셨어요. 저보고 ‘신 단장 이거 봐봐. 배가 쑥 들어가서 옷이 이만큼이나 남아’ 하시더라고요. 몸을 만져 보니 정말 뼈만….”

―제작진도 고민이 많았겠습니다.

“말을 꺼내기가 너무 어려웠을 거예요. 30년을 넘게 하신, 당신 분신 같은 프로그램인데 그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상처가 되겠어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선생님이 결국 마음을 정하셨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전주쯤에 늘 다니시던 양복점에 지인을 통해 양복을 주문하셨거든요. 마지막으로 그 옷을 입고 무대에서 ‘이제 저는 이 프로그램을 놓습니다’라고 고별인사를 하려고 하신 거죠. 돌아가신 날(8일) 다음 날이 옷 찾는 날이었어요.” (선생님은 지금 하늘에서 뭘 하고 계실까요.) “하하하. 아마… 천국노래자랑 새로 만드시느라 바쁘시지 않을까요?”
신재동
1992년부터 전국노래자랑에 참여한 작곡가 겸 베이시스트. 송해의 ‘유랑청춘’, 남진의 ‘신기루 사랑’, 김국환의 ‘어쩌다 산다’ 등을 작곡했고, 2012년부터 악단장을 맡고 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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