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기척[이준식의 한시 한 수]〈358〉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3월 5일 23시 09분


대자연은 말이 없으되 정은 품고 있어,

추위가 다할 때면 으레 봄기운이 움튼다네.

울긋불긋 온갖 꽃을 이미 다 마련해 두고,

그저 새봄의 첫 우렛소리만 기다리고 있구나.

(造物無言却有情, 每於寒盡覺春生. 千紅萬紫安排着, 只待新雷第一聲.)

―‘새봄의 첫 우레(신뢰·新雷)’ 장유병(張維屏·1780∼1859)


봄은 꽃보다 먼저 기척으로 온다. 들판은 아직 비어 있고 바람 끝도 차가운데, 계절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직은 겨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안쪽에서는 이미 봄이 조용히 몸을 풀고 있는 때다. 시는 봄의 절정을 서둘러 과장하지 않는다. 꽃이 한창 피어난 뒤의 화사한 풍경보다 모든 것이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 신호만 기다리는 찰나에 시선을 둔다. 자연은 아무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은 결코 비어 있지 않다. 추위가 물러갈 무렵이면 어김없이 봄기운을 밀어 올리고, 꽃들은 저마다 피어날 차례를 기다리며 숨을 고른다. 무대 뒤 배우들이 분장을 마치고 막이 오르기만 기다리는 모습처럼.

새봄의 첫 우레는 단순한 날씨의 변화가 아니다. 잠든 만물을 깨우는 신호이자,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다. 그래서 이 시는 계절을 노래하면서도 그 너머의 변화를 함께 암시한다. 아편전쟁 직전의 암울한 시대를 살던 시인 앞에는 낡은 질서가 버티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는 이미 새로운 기운이 자라고 있었다. 시인은 그것을 정면으로 외치지 않고 자연의 이치 속에 조용히 숨겨 둔다. 어쩌면 봄은 늘 꽃보다 먼저, 이렇게 낮은 목소리로 오는지도 모른다.

#자연#계절변화#꽃#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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