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에는 좌우가 없는데…[이진구 기자의 대화, 그 후- ‘못 다한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2일 1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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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현 전 청와대 조리팀장 편

사진=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사진=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지난달 초 천상현 전 청와대 조리팀장을 인터뷰했습니다. 청와대가 개방된 지 얼마 안 돼 역대 대통령들의 의식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천 팀장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때 중식 담당으로 들어간 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까지 꼭 20년 동안 청와대 요리사로 대통령의 식사를 책임졌습니다. 남자 ‘대장금’인 셈이죠.

인터뷰를 하면서 의외였던 건 청와대 요리사들조차 정권이 바뀌면 대부분 바뀌는 게 관례였다는 점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만 빼면 그랬다고 하는 군요. 20년 간 살아남은 천 팀장이 굉장히 예외적인 경우고 홀 서비스 직원들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요리사로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청와대 정무직 직원들처럼 전임 정권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를 통해 역대 대통령들의 식사 모습을 엿보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라면을 좋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조리팀이 일요일이라도 좀 늦게 출근하라고 직접 끓여먹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지만 당시에는 광우병 파동으로 온 나라가 뒤집어졌었죠. 이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야외 바비큐 파티를 자주했는데 꼭 미국산 쇠고기로 하라고 조리팀에 지시했다고 합니다. 바비큐를 먹으며 얼마나 속으로 억울해했을까요.

사진=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사진=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박근혜 전 대통령은 불통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부분이 많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혼밥’도 그런 이미지를 부추기는데 한몫했죠. 그런데 천 팀장 설명을 들으니 박 전 대통령의 혼밥은 소화를 잘 못시키는 탓도 있더군요.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하니 함께 먹는 게 힘들어 이동 중에 간단한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정치나 정책, 사회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대통령 밥 먹는 것 갖고도 욕할 정도로 진영 간의 증오가 이렇게 심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응이 다양하더군요. 국민의힘 지지층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욕하고, 민주당 지지층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했습니다. 같은 보수 안에서도 박 전 대통령 지지층과 이 전 대통령 지지층이 또 다르더군요. 부동산 문제도, 대북 정책도 아닌 단순히 대통령들의 밥 먹는 스타일과 좋아하는 음식 이야기인데도 ‘그러려니’하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간에 미움이 쌓인 모양입니다. 호남 출신인 천 팀장에게 경상도 대통령들 모시느라 고생했다는 말까지 있었으니까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천 팀장은 그냥 웃는다고 합니다. 밥상에는 좌우가 없으니까요. 그는 중식 전문이니까 자장면에는 좌우가 없다고 해야겠군요.

우리 사회가 좌우 진영 논리에 갇혀서 서로 간에 색안경을 쓰고 이전투구만 해온지가 벌써 수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걸 말리고 갈등을 해소시켜야할 정치권은 정치적 계산만하며 오히려 증오를 부추기지요.

그가 청와대를 나와 차린 음식점에는 노 전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의 사인을 받은 접시가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대통령 퇴임 직전에 그가 실제로 청와대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들고 가 사인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나란히 건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물어보니 그는 “노 전 대통령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나중에라도 두 분 관계가 잘 풀렸으면 하는 마음에서”라고 말했습니다. 일개 요리사에게도 있는 마음이 왜 배웠다는 높으신 분들에게는 없는지 답답합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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