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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당신은 여전히 반짝입니다[이정향의 오후 3시]

이정향 영화감독
입력 2022-05-25 03:00업데이트 2022-05-25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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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김동호 ‘주리’
단편영화제의 심사를 위해 모인 개성 만점의 다섯 명. 영국 출신의 평론가와 일본에서 온 감독, 그리고 한국의 신인감독과 두 명의 베테랑 배우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다가 대상작을 두고 의견이 갈리자 돌변한다. 자존심 대결을 벌이며 팽팽히 맞서다 결국 난장판을 만든다.

24분짜리 단편이지만 특별하다. 76세 김동호 감독의 데뷔작이다. 1988년, 문화공보부 출신의 김동호는 영화진흥공사의 사장으로 영화계에 첫 입성을 했다. 52세의 늦깎이였기에 영화인으로의 변신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1996년 출범한 부산국제영화제를 15년 동안 이끌며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키워내 한국 영화의 위상을 드높인 업적만으로도 그는 모든 영화인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주리’는 김동호를 사랑하는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이 그가 오랫동안 꿈꿔온 감독 데뷔를 돕고자 배우, 스태프, 엑스트라 등을 자청하며 재능기부로 참여한 영화다. 24분 안에는 영화인들의 사랑과 열정이 응축되어 있다. 그의 인품과 능력을 접한 영화인이라면 이 영화의 완성에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주리’에서 배우 강수연은 반짝반짝 빛난다. 그녀만이 조명을 받는 듯 시종 반짝인다. 이렇게 빛나던 그녀가 이달 7일, 우리 곁을 훌쩍 떠났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TV에서 그녀의 첫 출연작 ‘똘똘이의 모험’을 보며 팬이 되었다. 감독이 된 후 그녀와 여러 번 마주쳤지만 30년 가까이 팬이었기에 어려워서 말도 제대로 못 건넸다. 그렇게 또 20년이 흐른 후, 그녀가 모든 활동을 접고 칩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친구가 되었다. 오랜 시간 애정을 쏟아온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물러난 후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낼 때였다.

작년 여름 밤, 우리는 동네에서 1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헤어졌다. 밤길을 스타가 혼자 걸어도 되냐는 내 걱정에 깔깔거리며 사뿐사뿐 걸어가던 뒷모습이 선하다. 그녀를 생각하면 멋지다는 단어부터 떠오른다. 외모보다는 성격이 더 멋졌다. 너무나도 이른 나이에 무거운 왕관을 쓰게 된 그녀이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 무게를 견뎌왔다. 배우로서의 자존심과 체통을 그 무엇과도 바꾼 적이 없다.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도량은 높고 또 깊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대를 원망하기는커녕 인간의 선함을 끝까지 믿었다. 한없이 베풀기만 하고, 받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 사람. 그녀의 진가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 내게 위안을 주지만 그래서 더 안타깝다. 늦었지만 그녀에게 아껴뒀던 말을 전한다. “당신은 최고로 멋진 사람입니다! 당신 덕분에 한국 영화가 큰 복을 누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정향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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