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기자의 對話]“한국이 붕대라도 보내줄 수 없냐고… 친구가 울며 물어”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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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겔 교수는 “우크라이나가 한국에 어떤 도움을 요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부탁을 드릴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남의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괴물은 언젠가 우리 앞에 서 있을지 모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쉐겔 교수는 “우크라이나가 한국에 어떤 도움을 요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부탁을 드릴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남의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괴물은 언젠가 우리 앞에 서 있을지 모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진구 기자
이진구 기자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아이들의 팔다리가 날아가고 있는데, 모스크바에서는 18일(현지 시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8주년 기념축제가 열렸다. 행사장 안팎에는 20여만 명이 몰렸고 모두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연설에 열광했다. 국내에서 러시아 침공 규탄 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올레나 쉐겔 한국외국어대 우크라이나어학과 교수(41)는 “이 전쟁을 ‘푸틴이 잘못해서’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대부분 푸틴 탓으로 보지 않습니까.

“한국에 있는 러시아 사람들 중에 제게 미안하다고 한 사람은… 20년 전 유학 와서 룸메이트도 함께한 친구 단 한 명뿐이었어요.” (주변에 러시아분들이 꽤 있을 텐데요.) “러시아 정부의 프로파간다(선전선동) 영향도 있겠지만, 다른 (러시아)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은 고사하고 아예 말을 안 해요.”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들은 ‘훈련인 줄 알았다’ ‘모르고 왔다’고 합니다만.) “저는 잡히면 그렇게 말하라고 교육받았다고 생각해요. 국경까지 올 때야 훈련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국경을 넘었는데, 그리고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쏘고 병원을 폭파시키면서도 훈련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전쟁을 푸틴만의 잘못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도자가) 잘못된 전쟁을 하면 국민들이 들고일어나야죠. 100만 명이 나서는데도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그 친구는 뭐라 하던가요.


“(전쟁 직후) 전화가 왔는데 못 받겠더라고요.” (왜요?) “그 친구가 우크라이나말을 몰라서 러시아어로 말해야 하거든요. 제가 러시아어로 얘기해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러다가 3, 4일 후에 받았는데… ‘부모님은 잘 계시느냐’고 묻더라고요.”

―편하게 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부모님과 몇 시간만 연락이 안 돼도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제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래 어떨 것 같으냐. 너희 나라에서 이렇게 폭격하고 있는데 괜찮을 것 같으냐….” (그런 생각이 든 건가요.) “아니요. 대놓고 말을 했어요. 그 친구는 평소에 푸틴에 대해 비판적이에요. 그 친구가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라는 것도 알죠. 머리로는 아는데….”

―러시아말을 하는 것조차 싫은데, 내 나라 수도를 러시아식 표기로 매일 보고 들어야 하는 건 더 힘들었겠습니다.


“원래 주한 우크라이나대사관에서 우크라이나 발음으로 바꾸는 운동을 추진해 왔는데 그동안은 잘 안 됐어요. 그런데 전쟁이 나면서 바뀐 거죠. 한국에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내 나라 지명을 침략자 발음으로 매일 보고 들어야 한다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에요. 다행히 한국 언론에서 바꿔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달 초부터 그동안 러시아식으로 표기되던 수도 키예프는 키이우, 하리코프는 하르키우, 리비프는 리비우 등으로 바뀌었다.

―혹시 우리가 본의 아니게 우크라이나분들에게 실수한 점은 없습니까.

“오늘 하나 있기는 한데… 인터뷰를 했는데 제가 말하지도 않았고, 한국분들이 보면 화날 수 있는 제목을 뽑은 거예요.” (뭐라고 했습니까.) “한국이 6·25 때 받았던 빚을 갚아야 한다고….” (당시 우크라이나가 도와줬으니 이번에 갚으라는 뜻으로 오해받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요.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6·25전쟁 때 한국에 해준 것도 없어요. 설사 해준 게 있어도 빚 갚으라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않나요? 국제사회의 도움을 부탁한 것뿐인데…. 저는 우크라이나가 한국에 어떤 도움을 요구하거나 요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부탁을 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런 기사가 나가면 한국분들이 좋게 보지 않을 거 같아요. 그래서 인터뷰를 안 하는 게 더 나을지 고민도 했어요.”

※이 기사는 이날 오후 내내 인터넷에 게재됐다. 이후 일부 수정이 있었지만 이미 원본이 곳곳에 퍼진 상태다.

―교수님이 아니면 한국에서 우크라이나 입장을 들을 통로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침공 직전 푸틴이 대국민 연설을 할 때 기자분들에게 연락이 많이 왔어요. 푸틴 주장 중에 어떤 게 진짜고 가짜인지 묻기 위해서죠. 한국에 우크라이나 사람은 300여 명밖에 없고, 그중에서도 한국어를 하는 분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알리지 않으면 한국에서는 미국이나 러시아, 또는 유럽의 시각으로만 상황을 보겠죠. 특히 러시아발 뉴스의 진위는 가리기 힘들 테고요.”

―집회도 주도하셨던데요.

6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시위에서 한 우크라이나 여성이 눈물을 닦고 있다.
6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시위에서 한 우크라이나 여성이 눈물을 닦고 있다.
“제가 주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보여서…. 전쟁이 터지고 너무 힘든데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보려고 재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모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커뮤니티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집회를 하자는 의견이 이미 나왔어요. 그런데 관할 경찰서까지 근무시간 안에 직접 가서 집회 신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는 거예요. 다들 생업이 있고, 지방에 계신 분도 있고, 무엇보다 한국어가 돼야 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신청하고, 성명서도 읽다 보니…. 모두가 자기 몫을 했어요.”

―한국도 뒤늦게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필요한 물품이 한둘이 아닐 것 같습니다.

“현지에서 간호봉사 하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어요. 울면서… 혹시 한국 정부가 붕대나 의료용품 같은 걸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아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국회에서 우크라이나 상황 설명을 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필요한 물품 목록을 드리고 부탁을 하는 정도죠. 다행히 종교·시민단체분들이 긴급구호연대를 결성했는데 실제로 물품을 보내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지원 물품 중에도 소용없는 게 너무 많대요.”

―소용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예를 들어 구호 물품이 든 컨테이너 하나가 오면 그 안에 진짜 필요한 건 30% 정도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뭔가요.) “곰돌이 인형 같은 거…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 곰돌이 인형을 어디에 쓰겠어요.” (음식은 어떻게….) “우크라이나군이 장악하고 있는 곳은 물자 공급이 되는데, 러시아군에 포위된 곳은 정말 힘들어요. 눈이 있을 때는 녹여 마시고, 지하실 파이프에 고인 물을 마시기도 하고…. 협상 중에는 인도주의적 통로를 열어두기로 했지만 말뿐이에요. 우리가 화물차를 보내면 바로 포격하니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코미디언 출신임에도 대통령이 된 게 이전 정치세력이 워낙 썩어서였다고 하던데….

“2012년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때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재임 2010∼2014년) 통역을 했는데….” (2014년 시민혁명으로 쫓겨난 친러 대통령 말인가요.) “네 맞아요. 푸틴의 꼭두각시인데 군 복무기간도 2년 반에서 1년으로 단축하고, 막판에는 6개월까지 줄이려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정상회의에 애인을 데려왔어요.” (네?) “영부인이 아니고 자기 요리사 출신의 불륜 관계인 여자를….”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중국 후진타오 국가주석 등 50여 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죄송합니다만 믿기 힘들군요.

“그러실 거예요. 도착 당일 통역을 한 뒤에 다음 날 정상회의가 있으니까 몇 시까지 오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정상회의 때는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회의 통역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닙니까?) “저도 이해가 안 돼서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까 내일 그 애인과 측근들 관광쇼핑 통역을 해달래요. 점심을 한국 전통식으로 예약해 달라고 했는데….” (궁중요리 같은 걸 원했나요?) “종류는 상관없고 1인당 100달러 이하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현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부모님과 여동생은 키이우에 있다가 외곽으로 피란했는데 얼마 전에 폴란드로 넘어갔어요. 사실 손녀만 아니었으면 부모님은 키이우에 남으셨을 거예요. 제 여동생에게 18개월 된 아기가 있는데 너무 위험해서 여동생이 혼자라도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차마 혼자 보낼 수 없어서 함께 수도 외곽으로 피했는데 거기도 포격이 심해지니까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서….” (다른 지인들은 어떻게….) “연락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죽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견딜 수 없어서 그냥 연락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화기를 잃어버렸거나 통신이 안 돼서 그런 것뿐이라고….”

※후원계좌 174-910024-87105(하나은행)
예금주 우크라이나 대사관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우크라이나#러시아#푸틴#올레나 쉐겔 한국외국어대 우크라이나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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