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만든 내가 없애자고 할 정도로 변질… 폐지해야”[이진구 기자의 對話]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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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순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박도순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우리 사회가 수능 만점자만 보지 말고 하위권 학생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교 교육과정이 하위권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수능이 그런 문제를 잘 평가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박도순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우리 사회가 수능 만점자만 보지 말고 하위권 학생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교 교육과정이 하위권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수능이 그런 문제를 잘 평가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이진구 기자
이진구 기자
《1993년 8월 20일, 처음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암기 위주인 학력고사의 한계를 극복하고, 비정상적인 교육 풍토를 쇄신하려는 의지가 담겼다”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몇 년 안돼 사교육비 증가의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문제 오류와 난이도 조절 실패로 해마다 논란에 휩싸였다. 수능 창시자로 불리는 박도순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79·고려대 명예교수)은 “대학이 수능 점수로 줄을 세워 뽑으면서 모든 것이 변질됐다”고 말했다.》


―수능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게 잘못됐다는 건가.

“원래 목적은 이 학생이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만 평가하고, 학생 선발은 대학이 스스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별고사(본고사)도 치를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대부분 대학이 본고사 대신 수능으로 뽑으면서, 수능 점수는 수험생을 줄 세우는 도구가 됐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1994학년도 입시에서 대학은 △내신 △내신+수능 △내신+본고사 △내신+수능+본고사 중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별 본고사를 치른 대학은 9곳뿐이다. 나머지 129곳은 내신+수능으로 선발했다.

―비극의 시작?

“늘 문제가 되는 난이도라는 건 처음 만들 때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해한 학생이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를 낸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변별력이 없지 않나.) “학생을 줄 세우기 위해 만든 시험이 아니니까. 수능은 고교과정을 충실히 이수했는지를 보는 거고, 충실히 배웠으면 좋은 점수를 받는 게 당연하다.”

―대학은 늘 학생 선발에 정부가 관여하지 말라고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제로는 아니다. 돈도 많이 드는 데다 보안 등의 문제가 생기면 감당이 안 되니까. 제대로 시험을 치를 능력이 안 되는 곳도 많다. 또 능력이 되는 대학도 수능으로 뽑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다.” (좋은 곳은 왜?) “전국에서 몇 등이나 되는 학생을 뽑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수능뿐이니까.”

―올해도 평가원장이 사퇴했는데, 왜 출제 오류가 끊이지 않는 건가.


“해당 과목 교수·교사들이 출제와 검토를 맡지만 어떤 과목을 많이 안다고 좋은 문제를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문항 출제는 그 자체로 별도의 공부와 경험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런 전문 인력이 없다. 미국에서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이 생긴 이유도 그런 고민 때문이었다.” (하버드, 예일대 교수들이 좋은 문제를 못 낸다고?) “미국 대학들은 해당 분야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로 학생을 선발하지 않는다. 학문을 배울 능력이 있는가를 본다. 그래서 SAT를 대학입학자격시험이라고 부르는 거다. 최고의 석학들은 수두룩하지만 그들은 이런 문제를 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몇 개 대학이 공동으로 SAT를 만들었는데, 해보니까 유익해서 ETS를 만들어 주관하게 한 거다.”

※SAT는 1926년 처음 시행됐다.

―SAT라고 오류가 없을 수는 없지 않나.

“SAT는 우리 수능처럼 단기간에 출제하고 시험 보지 않는다. 문제은행식이라 평상시에 문제를 만드는데, 전문 연구원들이 10가지가 넘는 검토 과정을 거친 뒤 문제로 확정한다. 그래서 오류도 적지만 만에 하나 오류가 있어도 큰 의미가 없는 게 참고자료로만 쓰지, 그걸로 당락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출제하면 문제 유출 등 보안 문제는 없나.) “그 사람들은 걱정 안 한다. 물론 출제자가 비밀엄수 각서는 쓴다. 하지만 별 의미가 없는 게 자신이 출제한 문제가 5년 후에 쓰일지, 10년 후에 쓰일지 모른다. 보통 5년 정도 후에 출제되기 때문에 지금 빼내 봐야 소용이 없고 문항 추출을 컴퓨터가 무작위로 하기 때문에 빼낸 문제가 나올지 알 수도 없다.”

―늘 물수능, 불수능 논란이 이는데 난이도 맞추기가 그렇게 어렵나.


“난이도가 높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어렵다는 뜻 아닌가?) “다들 그렇게 아는데 학문적으로는 반대로 문제가 쉽다는 뜻이다. 난이도를 말할 때 기준은 정답률이다. 정답자가 많으면 정답률이 높으니 난이도는 쉬운 거고, 적으면 어려운 거고. 수능처럼 수 십만 명이 시험을 보면 점수가 거의 정상 분포에 가깝게 나온다. 전체 수험생 점수가 정상 분포를 보였다면 난이도 논란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왜 늘 불수능, 물수능 논란이 벌어지냐 하면 상위권 학생들에게 쉬웠느냐, 어려웠느냐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평가원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늘 난이도 조절 실패를 자인하나.

“그게 참 어렵다. 화가 나 있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당신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평가원장(1998∼2000년) 할 때 이런 항의도 있었다. 문제를 주고 ‘다음 중 X의 값은?’이라고 물었는데 그게 어디에 나온 질문이라는 거다.” (X값이 뭐냐는 건 그냥 물음일 뿐인데.) “그렇지. 그런데도 항의를 한다. 평가원장을 할 때는 화형식을 당한 적도 있다. 당시 평가원이 서울 삼청동에 있었는데 그 앞에서 수능 반대 단체가 내 화형식을 했다.”

1993년 8월 19일 1차 수능 전날 예비소집에서 주의사항을 듣고 있는 수험생들. 이해에 첫 도입된 수능은 한 해에 일곱 번 치르는 미 SAT를 본떠 8, 11월 두 차례 치러졌다. 동아일보DB
1993년 8월 19일 1차 수능 전날 예비소집에서 주의사항을 듣고 있는 수험생들. 이해에 첫 도입된 수능은 한 해에 일곱 번 치르는 미 SAT를 본떠 8, 11월 두 차례 치러졌다. 동아일보DB
―그래도 만든 당신이 수능이 없어져야 한다고 하는 건 좀….

“처음 설계했던 수능이 아니니까. 단순 암기력만 측정하는 학력고사를 탈피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수없이 변질되더니 결국 똑같아졌다. 이런 수능은 없애야 한다. 다시 학력고사로 돌아가든지.” (처음에는 언어, 수리 두 분야만 보겠다고 발표했던데.) “대학 수업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과 논리적으로 사고하는지만 평가하려 했으니까. 그래서 제도 설계 때는 대학교육적성검사라고 불렀다. 당연히 언어는 국어시험이 아니고, 수리도 수학시험이 아닌 일종의 지능검사와 비슷했다. 그렇게 새 대입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는데 바로 과학계에서 밀고 들어왔다. 과학 한국을 만들자면서 어떻게 과학을 뺄 수 있냐고. 그래서 정원식 문교부 장관에게 ‘노태우 대통령에게 꺾이지 말고 처음 계획대로 해야 한다고 말해 달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고 갔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인가.

“대통령도 못 막더라. 정 장관이 다녀오더니 ‘과학은 좀 넣어주자’고 했다. 과학이 들어가니까 이번에는 사회 쪽에서 밀고 들어왔다. ‘사회를 빼고 탐구를 논할 수 있느냐’ 이러면서.” (탐구?) “처음 수능제도 계획을 발표할 때 ‘언어, 수리’만 한다고 했기 때문에 대분류를 늘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리’ 옆에 점을 찍고 ‘탐구’를 붙인 뒤 탐구 안에 과학 영역을 넣는 고육책을 썼다. ‘언어, 수리·탐구’ 이렇게. 그 탐구 안에 과학과 사회 문제를 낸 거다.” (영어가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났을 것 같은데 의외다.) “영어는 영어 쪽이 아니라 대학들이 요구했다. 원서를 많이 보는데 독해능력은 측정해줘야 한다고. 한 번 무너지니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독해 평가를 넣었는데 조금 지나니까 의사소통이 중요하다며 듣기 평가를 요구했다. 그렇게 모든게 다 바뀌어 갔다.”

―수능으로 사교육도 잡겠다고 했다.

“사교육 감소는 처음부터 정책 목표로 두지 않았다. 수능을 도입한 목적은 암기 위주 교육 탈피였다. 그런데 정치가 개입하더니 교육부에서 있지도 않던 사교육 감소 효과도 있다고 발표했다. 나는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거짓말?) “사교육은 경쟁이 사라지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다. 제도가 바뀐다고 경쟁이 없어지는 게 아니지 않나.”

―수능은 최소한 공정하다는 믿음이라도 있지 않나.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 사건, 조국 사태, 정유라의 이대 입학 등 입시 부정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온 국민이 분노했다.

“그건 강한 처벌로 응징해야지. 부정행위가 발생할 때마다 제도를 바꾸면 남아날 제도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참 어이없는 게, 힘 있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애초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수능은 아니고 과거에 석사장교 선발심사위원장을 했을 때인데 커트라인 밑에 있던 지원자가 합격하는 일도 있었으니까.” (누가 점수를 올려준 건가?) “그건 범죄니까 못하고 그 지원자가 속한 분야 정원이 기존보다 두 배로 늘었다. 다른 분야는 줄이고.”

※석사 학위자를 선발해 장교로 6개월 임관시키고 전역시키는 제도. 1982년에 생겨 1991년 없어졌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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