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바퀴벌레인민당(Cockroach Janta Party)’을 아시나요? 인도 청년의 좌절감을 풍자해 생겨난 가상정당이 순식간에 인도 Z세대를 끌어모으더니, 이제 조직을 갖추고 전국적인 청년운동으로 진화 중입니다. 이번주 토요일인 6월 6일엔 첫 거리 시위까지 예고했죠.
단순한 온라인 밈이 거리 시위로 번지기까지 고작 20일 남짓. 인도 청년들이 그동안 얼마나 억눌려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는데요. 그런데 왜 이들은 시위에서 “교육부 장관 퇴진”을 외치는 걸까요. 인도를 뒤흔드는 바퀴벌레당 현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2200만명, 공식 사이트 가입 회원 100만명을 자랑하는 인도의 새로운 청년운동 ‘바퀴벌레당’. 이제 그들이 온라인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나선다. 인도 바퀴벌레인민당 홈페이지
“사회에는 시스템을 공격하는 기생충들이 존재합니다. 바퀴벌레처럼 일자리도 없고 전문 분야에 자리도 없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언론, 소셜미디어, 정보공개 청구운동, 기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며 모든 사람을 공격합니다.”
아니, 이 무슨 망언인가요. 5월 15일 수리야 칸트 인도 대법원장이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생충에 바퀴벌레? 인도의 청년 실업자들로선 참을 수 없이 모욕적 발언이었는데요.
다음날, 미국에서 유학 중인 서른살의 인도인 아비짓 딥케가 ‘바퀴벌레인민당’을 창당했다며 홈페이지를 엽니다. “게으르고 온라인에 중독됐고, 최근엔 바퀴벌레라는 소리를 듣는 젊은이들을 위한 정당”이라면서 말이죠. 정당 이름의 약자는 CJP.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소속된 집권당 BJP(인도 인민당)에 대한 풍자였습니다.
30세인 아비짓 딥케는 2020~2022년 인도의 한 정당에서 소셜미디어를 담당하면서 디지털 캠페인을 진행한 적 있는 인물이다. 이후 2023년 미국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홍보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미국에서 취업을 준비하던 중 바퀴벌레당이라는 온라인 밈을 만들었고, 이는 본인이 전혀 예상치 못한 뜨거운 반응으로 이어졌다. 아비짓 딥케 X 계정 바퀴벌레라는 모욕에 되레 ‘그래, 우리는 썩은 시스템 때문에 바퀴벌레가 됐다’고 되받아치며 탄생한 바퀴벌레당. 이에 인도 청년들은 열광했고요. 바퀴벌레당의 SNS 계정 팔로워와 웹사이트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갑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줄로 알았던 Z세대가 보여준 이례적이고 놀라운 결집이었죠. 수많은 청년이 딥케에게 DM으로 “당신이 유일한 희망이니 제발 이 문제를 제기해달라”고 호소했다고 해요.
바퀴벌레당은 비록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2029년 총선을 위한 5개 어젠다’도 제시했는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걸 보면 현재 인도 정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죠.
-대법원장에 퇴직 후 보상으로 상원의석을 주지 않는다 (사법권 독립) -부정투표가 발생하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테러방지법에 따라 체포한다 (공정한 선거) -국회의원과 내각 장관직의 50%를 여성에게 할당한다 (성평등) -암바니와 아다니(인도의 대표 재벌)가 소유한 모든 언론사의 면허를 취소한다 (언론 독립) -정당을 옮긴 주의원과 국회의원은 20년 동안 출마를 금지한다 (철새 정치인 퇴출)
바퀴벌레당 지지자들은 당 로고 스티커를 붙이고, 바퀴벌레 벽화를 그리고, 심지어 바퀴벌레 분장을 한 채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지지를 표현하고 있다. 바퀴벌레당 SNS 젊은 민심의 심상찮은 움직임. 인도 정부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겠죠. 인도 정부는 ‘국가 안보 및 주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바퀴벌레당의 X 계정 접속을 차단했어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같은 ‘외세와 결탁한 불순한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은 거죠.
그럼, 정부의 압박에 바퀴벌레들이 자취를 감췄을까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우리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시도가 우리가 옳다는 증거’라는 인식만 심어줬고요. 바퀴벌레당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하루에 수백만 명씩 쭉쭉 늘어서 순식간에 2200만명을 돌파합니다. 12년째 집권 중인 인도 인민당의 인스타 팔로워 수(약 900만명)를 압도해 버린 거죠.
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대학 입시
인도 Z세대를 위한 새로운 정치 커뮤니티의 탄생. 하지만 이것 역시 한때의 인터넷 유행에 그치는 게 아닌가 했는데요. 때맞춰 청년층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을 만한 대형 스캔들이 줄줄이 터져 나옵니다. 의대 입시 시험지 유출 스캔들과 대입 채점 부실 스캔들이죠.
의사는 인도에서도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직업으로 통해요. 전국 정원이 11만명인 의대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봐야 하는 시험이 의대 입학시험(NEET)인데요. 올해도 227만명의 수험생이 몰렸습니다.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겨뤄서 그중 단 5%만 통과하는 서바이벌인 거죠.
그런데 5월 3일 지필 시험이 끝난 뒤, 수상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일부 과목 시험문제가 메신저를 통해 약 40만원에 팔렸던 ‘예상 문제’와 정확히 일치했죠. 인도 사회가 발칵 뒤집히면서 수사가 벌어졌는데요. 그 결과 내부 출제 전문가와 브로커, 학원 강사들이 결탁해 조직적으로 문제를 빼돌린 충격적인 비리가 확인됩니다.
결국 시험은 취소됐고 전면 재시험을 치르기로 했는데요. 아니, 밤잠 아껴가며 고생해서 몇 년을 공부했더니만, 시험지 유출 비리로 재시험이라니. 수험생과 학부모 입장에선 날벼락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죠. 실제로 합격을 눈앞에 뒀다고 생각했는데, 재시험 통보를 받고 심리적으로 무너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이 여럿 나왔습니다.
인도에서 NEET는 전국의 수재들이 몰리는 시험이지만, 고득점을 받아 의대에 입학할 수 있는 건 수험생의 5%도 채 되지 않는다. 이미지는 인도의 한 사립학원의 의대입시 컨설팅 광고.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인도에선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한 ’12학년 보드 시험’을 2~4월에 걸쳐 보는데요. 인도 중앙중등교육위원회가 5월 13일 성적을 발표한 뒤 난리가 났습니다. 점수가 이상한 사례가 너무나도 많았던 거죠.
문제는 올해 처음 도입한 디지털 채점 시스템에 있었습니다. 답안지가 다른 사람과 아예 뒤바뀌거나, 너무 흐릿하게 스캔돼서 몽땅 0점 처리됐거나, 답안지 뒷장이 통째로 누락되면서 점수가 우수수 깎인 거죠.
이 사건은 국가적 스캔들로 번졌는데요. 알고 보니, 이 채점 시스템을 담당한 업체는 이미 2019년 한 지역에서 대규모 성적 오류를 일으켜서 수험생 18명이 목숨을 끊게 만든 부실 업체였고요. 당연히 입찰을 금지했어야 하는데, 어떤 이유인지 입찰 자격요건이 수정되면서 계약을 따냈습니다. 정부는 부인하지만, 정부 기관이 부실 업체와 결탁해 특혜를 줬을 거란 의혹이 나올 수밖에 없죠.
이건 생존이 걸린 시험이다
한 문제를 맞느냐 틀리느냐에 따라 대학에 붙느냐 떨어지느냐가 걸려있는 입시. 그런데 사설 학원엔 유출된 의대 입시 시험지가 나돌고, 수능 답안지는 채점 실수로 0점 처리되다니. 이만저만 큰일이 아닙니다. 이번에 의대 입학시험을 본 한 인도 청년은 분통을 터뜨렸죠.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시험에 합격하려고 모든 걸 포기했는데, 재시험을 봐야 하다니. 내년에도 또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나요?”
이런 절망은 인도의 극심한 청년 실업률과도 맞물려있습니다. 인도는 대학 진학률이 꾸준히 높아졌지만 아직 28% 정도이죠. 대학 나온 사람이 여전히 소수인 나라인데요. 문제는 이렇게 대학 교육까지 받은 고학력자들을 위한 취업문이 너무 좁다는 겁니다. 대졸자들이 원하는 괜찮은 일자리가 워낙 부족하기 때문이죠. 고용 능력이 큰 제조업이 약하고, 금융·IT 같은 소수의 첨단 서비스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 탓인데요.
인도에선 매년 약 500만명의 대졸자가 배출되지만, 이들이 선호하는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는 170만개에 불과합니다. 미스매치가 대단히 심각하죠. 학력이 낮으면 노점이라도 차려서 밥벌이를 할 텐데, 비싼 돈 들여 대학 공부를 한 바람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실업자가 되는 대졸자가 너무 많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25세 미만 대졸자 실업률은 무려 39.3%, 25~29세 대졸자 실업률도 20%에 달한다죠(2023년 기준).
인도의 만 25세 이하 청년의 학력별 실업률 비교. 특이하게도 고학력일수록 실업률이 높게 나타나는데, 중졸은 9.97%, 고졸은 16.33%, 대졸자는 39.33%에 달한다. 아짐프렘지대학 보고서 일부 상위권 대학을 제외하면 졸업 뒤 실업자가 되거나 평생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머물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문대 선호 현상이 더욱 커져가죠. 높은 연봉까지 보장되는 의대, 공대 입학은 최고의 꿈이고요. 그게 아니면 학맥을 쌓을 만한 좋은 대학을 나와서 공무원으로 취업하는 게 가장 안정적인 길입니다.
즉, 인도에서 명문대 입학은 간판이나 출세의 문제를 뛰어넘어요. 훨씬 더 절박한 생존이 달린 문제이죠. 꼭 대단한 성공을 바라서가 아니라, 하위 계층에서 탈출하려면 일단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러니 대학 입시 공정성에 목을 매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그런데 문제 유출이라니, 부실 채점이라니, 비리와 부정부패라니. 형편없는 국가 시스템을 향해 분노하는 게 당연합니다.
바퀴벌레, 이제 광장으로
그래서 바퀴벌레당이 이 문제에 나섰습니다. 바퀴벌레당은 다르멘드라 프라드한 교육부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에 80만명의 서명을 모았고요. 6월 6일 뉴델리 잔타르 만타르 광장에서 평화시위를 연다고 공지했어요.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인 창립자 딥케는 6일 아침 뉴델리로 돌아가기로 했죠. SNS로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메시지가 빗발치고 있는데도 말이죠.
그는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엄청난 호응이 있고, 수만 명이 시위에 참여할 걸로 예상합니다. 우리가 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현재 정치권에서 아무도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린 청년의 관심사와 열망을 중심으로 국가 정치가 이뤄지는 진지한 운동이 되길 바랍니다.”
바퀴벌레당은 조직 체계를 갖추기 위해 3명의 공식 대변인도 임명했어요. 기자·작가·컨설턴트 출신의 대변인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인도 청년 전체의 당이다. 설사 아비짓 딥케가 체포되더라도 시위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요. 집권 여당이 제기하는 ‘야당 공작설’과 ‘불법 자금 조달설’ 같은 루머에도 적극적으로 반박했죠.
소남 왕추크는 40년 동안 환경과 교육 운동을 해온 인도의 저명한 활동가이다. 그의 공개적인 지지선언은 바퀴벌레당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왕추크는 한국에서도 개봉했던 인도 영화 ‘세 얼간이’의 주인공 란초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로도 유명하다. 바퀴벌레당 SNS 든든한 지원 세력도 합류했습니다. 저명한 시민운동가 소남 왕추크가 6일 바퀴벌레당의 시위에 동참한다고 공식 선언했어요. 그는 바퀴벌레당의 주장에 대해 “젊은 세대의 매우 건설적인 의견”이라며 “정부도 불안해하지 말고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지지를 표명했는데요. 시위의 정당성과 무게감을 한층 더해주는 인물입니다.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합니다. 인도 정부는 과연 바퀴벌레당의 첫 시위를 순순히 허용할까요? 이미 정부 측 인사와 친정부 언론이 ‘바퀴벌레당은 반국가적 외국 세력의 음모’라고 공격하면서 탄압의 빌미를 찾는 분위기인데요. 권위주의 체제를 굳혀가고 있는 모디 정권이기에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바퀴벌레당이 이미 선언한 대로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들의 본부가 있고요. 정부가 그들을 억누를수록 오히려 더 강해질 겁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죠. 그게 바로 바퀴벌레의 힘이니까요.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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