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윤상호]‘귀신 잡는 해병’ 창설 70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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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일방적으로 국군을 밀어붙여 8월 초엔 선두 부대가 당시 경남 마산 외곽의 진동리 고개까지 도착했다. 이 고개만 넘으면 평평한 김해평야를 거쳐 부산을 손에 넣고 남한 함락을 완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매서운 반격에 발이 꽁꽁 묶였다. 소규모 국군 부대의 잇단 기습에 허를 찔린 북한군의 부산 점령 기도는 결국 무산됐고, 아군은 천금같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당시 우리 해병대가 거둔 진동리 전투의 승리는 인천상륙작전 등 총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1949년 4월 15일 대대급 부대로 창설된 해병대는 6·25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주요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귀신 잡는 부대’라는 외신의 찬사를 받았고, 이는 해병대의 상징이 됐다. 9·28 서울 수복 때 중앙청에 태극기를 가장 먼저 게양한 주인공도 해병대원이었다. 1960년대엔 많은 해병대원이 베트남전쟁에 파병돼 숱한 전과를 거뒀다. 현재 백령도와 연평도에 배치된 해병부대는 북한군의 목과 허리를 겨눈 ‘비수’와도 같다. 우리 해병대의 서북도서 일대 반격이 두려워 북한군은 섣불리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연평도 해전 때 불붙은 헬멧을 쓴 채 반격한 해병대원의 애국심을 국민들은 잊을 수 없다.

▷창설 70돌을 맞기까지 해병대는 부침(浮沈)의 역사를 겪었다. 1960년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란 영화가 큰 인기를 끌 정도로 국민적 사랑을 받다가 1973년 10월 군사정권 시절엔 해체돼 해군에 통합됐다. 독특한 군대 문화를 가진 해병대의 부상(浮上)을 육군 일색의 정권 수뇌부가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민주화 물결이 밀어닥친 1987년 11월 해병대는 해군에서 독립해 독자 사령부로 재창설됐다. 요즘 출산율 급감으로 병역 자원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지만 해병대 지원율은 3∼4 대 1 수준이다. 혹독한 훈련을 거쳐 ‘빨간 명찰’을 달기 위해 3수, 4수는 기본이고 10여 차례 도전하는 지원자도 있다고 한다.

▷우리 해병대는 병력 규모(약 2만9000명)로는 미국(약 18만 명) 다음의 세계 2위 수준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내용면에선 전천후 상륙능력을 갖춘 미 해병대에 견줄 바가 못 된다. 유사시 적 해안 기습상륙이 주 임무인데도 이를 독자 수행할 전력이 여전히 태부족이다. 여단급 상륙작전(3000여 명)도 202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해병대가 명실상부한 ‘전략기동부대’로 거듭나려면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관심이 뒷받침돼야 한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sh1005@donga.com
#6·25전쟁#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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