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54>공중전화 박스를 나오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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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화 박스를 나오며
―최승철(1970∼)

방금 나간 여자의 체온이 수화기에 남아 있다. 지문 위에 내 지문이 더듬는 점자들, 비벼 끈 담배꽁초에 립스틱이 묻어 있다. 간헐적으로 수화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로운 사람은 쉽게 절박해진다. 모서리에 매달려 있는 거미의 눈빛이 여자의 체온으로 차가워졌다.

살아는 있니?

여름쯤 손가락에 눌려졌을 모기가 유리창에 짓눌려져 있다. 절박함 없는 희망이 있던가. 남자는 방금 나간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공중전화 박스를 나오다 관상용 소국(小菊) 하나를 툭, 쳐 본다. 여러 개의 꽃대궁이 동시에 흔들린다. 뿌리가 같은 이유다. 늦기 전이라는 노랫말이 죽기 전이라고 들리는 저녁, 애틋해서 되뇌이는 건 아니다. 차라리 살아서 날 미워해 버스 광고가 지나간다. 그저 당신이라고 부르고 싶은 계절이다.

너도나도 휴대전화를 갖게 된 뒤부터 특히 번화가에서는 공중전화가 거의 사라졌다. 요즘 공중전화를 많이 이용하는 사람으로는 코리안 드림을 안고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를 꼽을 수 있으리라. 변두리 동네 버스정류장 근처 공중전화 박스를 지나칠 때면 제 모국어를 절박한 목소리로 쏟아내고 있는 그들을 이따금 본다. 대개 신산할 그 이용자들의 삶처럼 공중전화 박스는 이래저래 쓸쓸하다.

‘방금 나간 여자’나 그 여자가 차마 끊지 못하고 내려놓은 수화기에서 여자 이름을 부르는 남자나 외로운 사람들이다. 공중전화 박스 안 ‘모서리에 매달려 있는 거미’나 ‘유리창에 짓눌려져 있’는 모기도 외롭다. 화자도 외롭다. ‘하나를 툭,’ 치니 ‘여러 개의 꽃대궁이 동시에 흔들’리는 소국(小菊)처럼, 모두가 외로운 외로움의 맥놀이.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현재 주거 부정에 신용불량일 듯한, 삶이 위태로워 보이는 모르는 여인과 기타 등등 사람이 공중전화 박스에 남긴 자취가 화자 가슴에 우수를 불러일으킨다. ‘그저 당신이라고 부르고 싶은 계절’이란다. 당신, 당신들, 어디서든 부디 살아 계시오! 숨 받아 태어난 존재들은 원초적으로 외로운데, 게다가 어떤 인생은 구차하고 치사하기도 하다.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대견하고 고마운 일인가!

그 여인, 담배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을까. 새해부터 담뱃값이 대폭 오른다. 살림이 어려운데 담배를 정 못 끊겠으면 마당이나 베란다에 담배를 키우는 것도 한 방편이리라. 마음 맞는 사람끼리 텃밭을 얻어 담배 주말농장을 할 수도 있으리.
#공중전화 박스를 나오며#최승철#공중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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