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도 네온사인도 꺼졌다, 암흑천지로 변한 대한민국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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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7>오일쇼크

1973년 겨울을 강타한 오일쇼크로 석유값이 30%나 오르고 일부 도시에서는 연탄 생산과 판매가 제한되었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 연탄을 담기 위해 대야 빨래판 등을 이고 가게 앞에 줄지어 선 시민들. 동아일보DB
1973년 겨울을 강타한 오일쇼크로 석유값이 30%나 오르고 일부 도시에서는 연탄 생산과 판매가 제한되었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 연탄을 담기 위해 대야 빨래판 등을 이고 가게 앞에 줄지어 선 시민들. 동아일보DB
김종필 국무총리는 1973년 12월 26일 밤 9시부터 10시 40분까지 1시간 40분에 걸쳐 전국의 TV 및 라디오를 통해 “헌법을 고쳐야 되느니, 가두서명을 하느니, 민주회복을 하느니 하는 일체의 행위는 삼가야 하며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선동하는 것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는 대국민 특별방송을 한다.

12월 28일엔 문공부가 ‘언론자율규제 기준 3개항’이라는 것을 발표한다. 10월 유신 이념과 체제에 대한 부정이나 도전, 국가안보 및 외교상의 중대한 위험을 초래하는 사항, 사회불안을 조성하거나 경제안정기반을 와해하는 보도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규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개헌서명운동에 종교계 신자들이 포함된 것을 의식해 “종교가 종교를 빙자하여 사회질서를 파괴하거나 국가안보를 해치는 활동을 할 때는 관계법령에 따라 제재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튿날 29일 거리에는 호외가 뿌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담화에는 ‘불순분자’ ‘과대망상증’ ‘황당무계’ 등 감정적인 표현들이 동원되었다. 박 대통령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음을 드러낸다.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누누이 설명하고 절대로 경거망동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을 국민에게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불순분자들은 아직도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서…이들의 황당무계한 행동이 자칫 국가안위에까지 누를 미칠까 염려하여 한 번 더 냉철한 반성과 자제를 촉구하는 동시에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소위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두는 바이다.”

73년 12월 들어선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체제의 임무도 정권안보가 최우선 과제였다. 군법무관 정보부차장 검찰총장 법무장관을 지낸 신 부장은 ‘법’ 전문가였으니 유신헌법을 앞세워 정권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은 셈이다.

그는 61년 5·16 한 달여 만인 6월 20일 발표된 중앙정보부법을 기초했던 박정희 소장의 법무참모이기도 했다. 그리고 법무장관으로서 유신헌법을 기초한 뒤 이후락 부장에 이은 제7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유신체제 수호의 최전방을 지휘한다. 그는 중정 부장이 되자 법질서 확립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런데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민생이 안정되면 민중은 때론 독재를 참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면 독재정권 심판의 주체는 더이상 지식인들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민생의 고통을 참아오던 민중이 지식인들의 투쟁에 가세하게 된다. 당연히 투쟁은 격렬해지게 되고 정권은 큰 위기에 빠진다. 73년 말부터 터져 나온 유신 독재에 대한 항거는 민생의 위기와 맞물려 강도(强度) 면에서 다른 시기와 많이 달랐다. 다름 아닌 미국의 경기침체와 함께 73년 겨울 한국 사회를 강타한 ‘1차 오일쇼크(석유파동)’였다. 오일쇼크는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에 따른 것이었다.

72년 배럴당 2.5달러이던 원유가는 73년 말 5.3달러로 급상승한 데 이어 74년에는 11.25달러까지 치솟았다. 야심 차게 시작한 중화학공업화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닥친 1차 오일쇼크는 한국 경제를 매섭고 추운 칼바람 속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기름이 많이 드는 중화학공업으로 석유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68년을 전후로 주요 에너지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며 72년에는 국내 소비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었다.

오일쇼크는 물가 폭등을 넘어 경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외환위기로까지 이어졌다. 국제수지는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보유외환은 고갈되어 갔으며 순외화자산은 마이너스로 반전됐다. 79년에 닥친 2차 쇼크는 ‘경험’이라도 있었지만 1차 쇼크는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것이라 당시 충격은 97년 외환위기에 버금갈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도시에서는 영하의 날씨 속에서 불을 때지 못하는 아파트 주민들의 고통이 줄을 이었고 화장실 수도가 얼어붙어 오물이 집 안에 넘치고 기름값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신문기사들을 보면 ‘조기방학’ ‘대낮 소등 생활화’ ‘버스정류장 간격 조정’ ‘택시 윤번제 실시’ ‘공장 조업 단축’ ‘목욕탕 영업시간 및 신규 허가 규제’에서부터 불 꺼진 대합실, 기름을 사려는 사람들이 늘어선 주유소, 플라스틱 물건도 없어서 못 파는 가게 풍경 등이 연일 실렸다.

대한민국 거리는 암흑으로 변했다. 가로등이 꺼졌고 상점의 네온사인도 꺼졌다. 밤거리가 어두워져 시민들은 서둘러 귀가했으며 가정에서도 전등을 한 개씩만 켰다. 석유가 모자라니 연탄 파동까지 일어났다. 어렵사리 이룬 한국 경제의 성취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경제가 부도나는 것 아니냐는 절망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1월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 이른바 ‘1·14 조치’를 선포한다. 총 9호까지 발표되는 긴급조치는 주로 정치적 조치가 대부분이었지만 3호는 순전히 경제 비상조치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1·14 조치는 ①저소득층의 부담 경감과 생활안정을 위한 조세 감면 ②고소득층의 재산, 사치성 물품 및 과도한 소비행위에 대한 중과세 ③노사협조 강화와 부당 근로조건 악화 방지 ④유통과정에서의 가격 조작에 의한 폭리 방지 ⑤예산의 일부 보정 등을 핵심 내용으로 했다. 다시 말해, 폭등하는 물가를 인위적으로 억제하고 서민의 세 부담을 줄여주는 한편 고소득 계층에게는 소비 억제와 노사 간의 협조 강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조치를 입안 실행하는 사령탑을 맡았던 김용환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회고록(‘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에서 “사채 동결 조치였던 8·3 조치 때와 마찬가지로 정책 입안 관련자 모두로부터 보안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서와 이를 지키지 못했을 경우를 가정해 사직서를 함께 받았다”고 전한다.

막상 조치가 발표될 때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의 말이다.

“14일에는 대통령 담화문도 함께 발표됐다. 사전에 오자 탈자 없이 수없이 퇴고를 했는데 국무회의에서 담화문을 통과시키려는 순간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각하, 틀린 글자가 하나 있습니다. 心氣一轉(심기일전)이 아니라 心機一轉입니다’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중요한 발표문에 실수를 했으니 혹시 호통이 떨어질까 했는데 박 대통령 말이 예상 밖이었다.

“통상 우리가 쓰는 한자는 ‘機(기)’가 맞지만 ‘氣’로 쓴 것도 좋지 않습니까. 마음과 기분을 한번 가다듬자는 의미인데 더 좋은 것 같습니다. 허허”

모두 대통령을 따라 웃으며 분위기도 누그러졌다. 김용환 비서관은 “경제 관료들을 휘어잡는박 대통령 특유의 용인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경제 관료들의 노력을 인정하고 사기를 꺾지 않으면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도록 뒷받침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떻든 이렇게 긴급조치까지 나왔지만 경제는 크게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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