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하상백]“패션은 세상의 축소판”…기발한 작품 남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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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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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soojin@donga.com
기분 좋은 공황 상태로의 초대장 같은 버킷리스트.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조각조각이 거의 다 기억날 것만 같을 정도로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훨씬 많을 거라 믿고 싶은 나에게 상당히 가혹(?)한 버킷리스트. “만약 일 년 뒤, 한 달 뒤, 일주일 뒤, 내일 당장!”이라는 시간적 마감을 두고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생각보다 많은 버킷리스트가 생긴다. 사람으로 태어나 품는 욕심은 당연한 것인지 모르나 평소 욕심이 많지 않다고 믿어오던 나에게 적잖은 배신감이 밀려온다.

난 탐미주의자인 것 같다. 아니 탐미주의자이고 싶다. 예쁘고 멋있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것이 좋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못나고 추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 기준으로는 예쁘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이다. 어릴 적부터 싹수가 아주 노란 아이였음에도 부모님을 비롯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패션을 하겠다는 나의 진로를 반대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미술관의 작품과 달리 패션은 그 예쁘고 멋있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에 감고 걸치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만둘 수 없을 정도로 중독돼 나에게 패션은 공기이자 물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솔직히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패션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기에 패션은 예쁘고 멋있고 아름답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패션을 포기하지 않을 것!

내가 왜 그토록 패션을 좋아하는지 오랜만에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얄미운 나비처럼, 얄궂은 미꾸라지처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잡으면 금세 놓쳐버리고 마는 그 움직임이 좋아서일지도 모르겠다. 패션은 세상의 앙증맞은 축소판 같다.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숨 가쁘게 변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개연성 없어 보이던 남자들의 하이힐과 스커트 착용은 몇몇 패션디자이너의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무대 위 연예인을 통해 대중에게도 익숙해졌다. 남자들의 피부 관리와 메이크업, 그리고 성형수술은 이제 필요에 따라 당연하다고 인식된다. 우리의 생활환경 그 자체뿐만 아니라 한없이 보수적일 거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의식마저 빠르게 변화를 좇는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순간도 정체하지 않고 움직이는 이 역동적인 흐름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의 흐름에 호기심 잃지 않기!

끊임없이 변화하는 트렌드, 패션을 정체시키지 않고 쉴 새 없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상상력. 난 사람이라는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보여주기 힘들고 눈앞에도 좀처럼 잘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불가능해 보이던 ‘새처럼 하늘 날기’를 가능하게 했고, 그 상상력이 멈추지 않은 덕에 심지어 ‘지구 밖으로 여행 가기’에 이르렀다. ‘이제 세상에 소개되지 않은 패션, 존재하지 않는 디자인은 없다’는 게으른 생각에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리고, 매 시즌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재와 디테일, 프린트, 실루엣 그리고 스타일링을 존재하게 하는 상상력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살아 있음의 가장 큰 특혜이자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 상상력. 마지막 순간까지 허무맹랑할지도 모를 기발하고 앙큼한 상상하기!

그리고 나의 마지막 버킷리스트.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아름다운 이유이자 슬픈 사연인 노화, 그리고 사라짐. 아니 속도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듯하다.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과 그때그때 자신이 원하는 속도로 여러 상황과 함께 편집해서 사용하는 상대적인 시간을 모두 즐길 수 있는 사람.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상상력의 에너지로 가득하기에 더욱더 아름다운 우리. 다른 존재로 태어나 사라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어 비교할 길은 막막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인생 한번 살아가는 것 자체가 뿌듯할 정도이니 내게 주어진 아름다운 시간을 끝까지 만끽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눈감기 전에 내 인생의 독후감을 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아름답다’라는 표현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 찾아내기!

하상백 패션디자이너·패션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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