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이효재]詩처럼 예쁜 노랫말 써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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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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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soojin@donga.com
계단 많은 집에서 익숙하게 지냈는데 얼마 전 결국 사달이 났다. 한 달 전쯤이었다. 방에서 작업실로 옮겨가려 몇 계단을 오르다가 문득 든 생각, “어머, 단추를 놓고 왔네!” 그 순간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몸을 돌리고 무사히 발을 내딛는가 싶었는데, 아차! 그만 발을 헛딛는 꼴이 됐다. 계단을 나뒹굴어 오른쪽 발목을 크게 다쳤다. 깁스를 하는 신세가 됐는데 주위에선 “쉬라는 뜻인가 보다”라며 덕담들을 했다.

다리는 아프고 불편했지만 주위에서 마음 써주고 위로해 주니 아이처럼 좋기도 했다. 그런데 꼭 해야 하는 숙제처럼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굿모닝 대한민국’이란 TV 프로그램에서 ‘효재처럼 사는 법’을 진행하고 있어 매주 하루는 지방 촬영을 가야 했다.

예고 없이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 절뚝거리며 나타난 내 모습에 담당 PD는 “이럴 수는 없다”며 괴로워했다. 난 “이 정도쯤이야. 사는 데 문제 돼?”라며 제주 촬영을 강행했다. 제주로 향하는 공항에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데 그러는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민망해 연신 바닥에만 시선을 뒀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도착해 ‘봄을 찾아’ 유채꽃밭 등 이곳저곳을 다니며 촬영을 했는데 저녁 무렵 문제가 생겼다. 무리한 탓에 다리가 퉁퉁 붓고 두 무릎에 마비가 왔다. 촬영을 중단하고 응급실에 가는 상황이 됐다. 깁스를 자르고 부은 발이 가라앉기만 기다리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간단한 일이 꼬여 큰 일이 되는 법. 두 곳의 응급실을 전전하고 119까지 동원됐지만 야간에 깁스를 자를 장비를 구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상태로 다시 촬영하던 식당에 도착했는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촬영을 구경하러 온 한 스님이 꽃꽂이용 가위를 구해 와 깁스를 자르기 시작했다. 이건 자른다기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못으로 벽을 긁어 파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발목을 내맡긴 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깁스는 돌덩이처럼 단단한데 꽃가위마저 없었다면 나는 어찌됐을까.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깁스에서 해방된 내 다리에도 피가 돌아 살 것 같았다. 다시 촬영을 시작하려 가방 속을 뒤적이는데 늘 가지고 다니며 메모하는 작은 수첩에서 뭔가 툭 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글귀 한 편이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중략)/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짧은 순간 시 한 편의 위안은 큰 것이어서 냉장고에 붙여놓았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문 여닫을 때마다 “안 어울리게 이런 걸 붙여 놓느냐”며 놀림 반 퉁을 주니 떼어 수첩에 끼워놓고 메모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읽던 글이었다. 난리법석 상황에서 문득 읽게 된 시 한 편의 고요함과 충만한 에너지는 이미 내겐 봄이고….

‘그래 봄 찾아 제주도 오길 잘했어.’ ‘조금 전의 고통도 잘 참아냈어.’ 꽃가위로 온 정성을 다해 깁스를 절단해주신 분, 발목 보조대를 급히 구해주신 분, 식당 안의 모든 이들의 마음이 봄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 밖의 떠있는 구름밭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옆에서 걱정하며 들여다보던 얼굴들, 식당 안의 식탁이며 수저통, 물컵들이 구름 조각과 겹쳐 떠올랐다. “고통이란 다 지나가는 거야, 살아있는 한 모든 건 지나가는 거야, 지나가는 구름들을 봐. 저렇게 우리 모두는 사라지는 거지.”

나에게 작은 소원이 있다면 술 한잔 마시고 달뜬 기분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예쁜 노랫말 하나 써보는 것이다. 나훈아의 ‘영영’이나 조용필의 ‘Q’처럼 아름답고 예쁜 노랫말 하나 써보고 싶다.

이효재 한복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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