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통일은 예고 없이 온다

  • Array
  • 입력 2010년 2월 12일 20시 00분


코멘트
22년 전인 1988년 5월 공산국가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동서독 장벽이 붕괴(1989년 11월)된 바로 전해다. 한국인이 동베를린을 관광하려면 특별한 절차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현지 여행사에 “남한에서 왔는데 동베를린 관광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안 될 이유가 뭐냐(Why not)?”고 되물었다. 남북한 관계를 설명해도 “문제없다(No problem)”고 했다. 그 말을 믿고 하루 코스 버스관광에 나섰다.

統獨은 기적 아닌 노력의 결과

동독 주민의 탈출을 막기 위한 콘크리트 장벽 너머 전망초소에선 동독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동-서 베를린의 관문인 찰리 검문소를 통과할 땐 바짝 긴장됐다. 동독 군인이 버스에 올라 관광객들의 여권을 검사했다. 백인 관광객들은 그와 농담도 하고 웃기도 했다. 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시비를 걸까 봐 불안했다. 다행히 대한민국 여권을 들춰보곤 바로 돌려줬다.

마침 5월 1일 노동절이었다. 어느 공원의 호숫가 잔디밭에서 수많은 가족단위 소풍객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 가족이 함께 모여 맥주를 마시며 웃음꽃을 피우는 일행에게 다가갔다. “서독이 훨씬 잘사는 걸 알고 있느냐”고 물어봤다. 모두 “알고 있다”고 했다. “서독에서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고향인 이곳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다소 의외였다.

사실 그들은 대부분 ‘국민차’로 불리는 동독제 소형차를 탈 정도였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가 마이카 시대를 막 열고 있던 무렵이다. 겉모습만 보고는 1년 반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동독은 안에서 곪아 가고 있었다. 통일되기 전 주간지 ‘디 차이트’의 동베를린 특파원이었던 마를리스 멩게는 저서 ‘동독의 통일혁명’에서 동독의 말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에리히 호네커의 학정(虐政)을 견디다 못한 주민들의 소규모 시위와 구속사태가 빈번했다. 동독 탈출의 기회만 노리는 사람도 많았다. 시위 때는 공산권의 개혁 개방을 선도한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연호했다. 서독을 비난하는 동독 TV의 아나운서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호네커는 “베를린 장벽이 50∼100년은 끄떡없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동독인들의 탈동(脫東)은 치열하고 감동적이었다. 바다와 강을 헤엄쳐 건넜는가 하면, 열기구를 만들어 가족 전체가 타고 넘어오거나, 큰 가방 두 개를 연결해 그 속에 숨어 탈출하기도 하고, 열차 바퀴 지지대에 매달려 사선(死線)을 넘었다.

멩게는 김정일의 북한 체제도 예고 없이 붕괴될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최근 방한한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반도 통일도 생각보다 빨리 올 수 있다”고 말했다.

동서독은 분단 직후인 1950년대부터 서신 교환을 허용했다. 1960년대 말에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정책으로 교류를 꾸준히 확대하고 가속화했다. 우리와 달리 전쟁도 없었다. 동독은 북한처럼 핵도 갖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지속적인 노력 끝에 온 것이지 하늘이 내린 기적이 아니다. 시기가 빨랐을 뿐이다.

北급변사태에 만반 대비해야

남북한은 1985년에야 이산가족 상봉을 시작했다. 그 후 15년간 중단됐다가 2000년 재개돼 작년 9월까지 17차례 실시됐다. 1998년 금강산 관광을, 2007년에 개성 관광을 시작했다. 금강산 관광은 2008년 7월 관광객 사살 사건 때까지 약 200만 명이 다녀왔다. 그러나 이산가족 생사 확인이나 서신 교환, 상호 방문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아픔 속에서도 조속한 통일을 원하지 않는 분위기는 서독이 더 심했다. 그런데도 통일됐다. 북한의 상황은 지난해 말 ‘화폐개혁’ 이후 급변사태가 우려될 만큼 심상치 않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저서 ‘통일은 산사태처럼’에서 말하듯 우리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을지도 모른다.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