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지갑 열기’도 애국이다

  • 입력 2008년 5월 23일 02시 55분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은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한 국제파 기업인이다. 하지만 현실을 설명할 때 어려운 경제용어 대신 피부에 쉽게 와 닿는 직설적 화법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는 지난해 7월 기자간담회에서 “돈은 엄청난 겁쟁이라서 미래가 불확실하거나 겁이 나면 어디로 숨어버릴지 모른다. 강압이나 윽박지른다고 해서 투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정부 및 사회 일각의 반(反)기업 기류에 대한 뼈 있는 지적이었다. 반면 9개월 뒤인 지난달 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이제는 돈이 나올 분위기가 충분히 됐다”고 진단했다. 우파(右派)정부로의 정권교체에 대한 재계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어려운 경제여건 아래서도 오랜만에 각 기업의 대규모 투자소식이 잇따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GS칼텍스는 다음 달 국내 정유업계 단일 프로젝트로는 최대 규모의 정유시설을 짓기 위한 첫 삽을 뜬다. LG디스플레이, SK에너지, 현대중공업, 삼성전자도 각각 1조 원 이상의 신규 투자계획을 내놓았다.

기업의 투자심리가 살아나는 것은 중요한 변화다. 시간을 두고 분명히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지금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는 부족하다.

경제성장률을 좌우하는 국내총생산(GDP)은 크게 소비, 투자, 순수출(수출―수입), 정부지출 등 네 분야로 구성된다. 투자는 성장의 중요한 변수이지만 모든 것은 아니다.

부존자원이 적은 한국에서 국제유가 등 원자재값 급등은 바로 수입액 급증과 국제수지 및 물가 불안, 성장률 저하로 이어진다. 원화가치 약세(원화환율 상승)로 수출이 호조인데도 무역수지의 적자행진이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98년부터 작년까지 10년간 매년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통한 적자재정이 이어졌다. 여기에 김대중 정부 5년간 투입된 159조 원의 공적자금과 노무현 정부 5년간 풀린 103조 원의 토지 보상비도 결국 재정을 동원한 경기 부양책 성격을 지녔다. 이 과정에서 급증한 국가 채무는 정부지출을 통한 경기 진작의 발목을 잡는다.

해외발 악재를 통제할 수 없고 재정 동원도 한계가 있는 현실에서 관건은 민간소비다. 내수경기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이기도 하다. 그나마 명품 소비는 활기를 띠지만 수입물가 상승에 따른 실질소득 감소와 고용사정 악화로 전반적 소비심리는 여전히 겨울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박한 것은 국내에서 돈을 쓰는 것이다. 저소득층은 지갑을 열어도 내놓을 돈이 없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 먼저 소비를 늘려야 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경제의 특성상 ‘가진 사람’이 돈을 쓰면 ‘덜 가진 사람’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소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꿀 때도 됐다. 과거 한때는 저축만 미덕(美德)으로 생각한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빚을 내서까지 돈을 쓰는 것은 문제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수록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현재 세계경제 여건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최악이란 말까지 나온다.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확대하고, 국민은 국내 소비를 늘리는 것이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길이다. 지금 ‘지갑 열기’는 외환위기 직후 ‘금 모으기 운동’만큼이나 의미 있는 애국이다.

권순활 산업부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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