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80돌 특집]민족-민주-문화는 21세기도 有效

  • 입력 2000년 3월 31일 22시 38분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인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는 21세기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동아일보 창간 80주년을 맞아 김학준(金學俊·인천대총장) 본사 편집논설고문이 사시를 오늘과 미래, 그리고 실천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

동아일보는 꼭 80년 전 오늘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신음하던 때 역사적인 창간사를 통해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동아일보의 3대 주지(主旨)로 천명함으로써 어둠 속에 방황하던 겨레에게 활로를 제시했다. 그 사이 조국은 광복을 되찾았고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대를 맞아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다짐하고 있으나 여전히 미로(迷路)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다. 이 중대한 시대적 전환점에서 국가와 민족이 나아갈 길을 심사숙고할 때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하게 된다.

▼민족주의로 분단 극복▼

첫째, 민족주의이다. ‘국경없는 세계’로 상징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의 시대가 펼쳐지면서 민족주의는 ‘죽은 이데올로기’로 간주되는 것이 서구 지성계의 큰 흐름이다. 민족주의는 심지어 ‘문명의 충돌’을 가져오는 부정적 요인들의 하나로 폄훼되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 겨레에게도 탈민족주의가 강요되고 있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나뉜 채 전쟁을 겪었고 그 뒤에도 대결을 거듭해 온 우리 7000여만 분단민중에게 민족주의는 결코 버릴 수 없는 대의(大義)이다. 남북이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하나가 되게끔 이끌어 줄 이념적 지향(指向)으로서 민족주의는 여전히 소중한 것이다. 이 깃발 아래 우리 민족은 고통과 비애의 대명사인 분단시대를 마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남한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패권주의의 극복을 위해서도 민족주의의 중요성은 계속해서 강조돼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글로벌라이제이션, 곧 세계화가 지닌 ‘신판 제국주의적’ 측면을 직시할 때 민족주의는 정신적 각성제로 힘을 쓸 수 있다. 모든 나라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의 단일 시장권으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세계화의 파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 민족은 우선 민족자해행위부터 끝내고 하나의 통일된 국제적 단위로 자리잡음으로써 대응능력을 극대화시켜야 하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편협한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국제평화주의를 지지한다. 국제적 갈등과 분쟁의 해결수단으로 무력사용을 배격함과 아울러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존중하며, 국제적 협력을 통한 이민족(異民族) 이국가(異國家) 이문화(異文化) 사이의 이해와 우호친선의 증진을 지지한다.

▼정치改革 계속 추진해야▼

둘째, 민주주의이다. 1970년대에 서구 지성계에서는 ‘민주주의 위기론’이 팽배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에서 민주헌정이 무너지고 권위주의체제가 확산됐을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민주정치의 비효율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민주주의의 장래에 대한 비관적 시각이 널리 펴졌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독재체제가 붕괴한 1990년대 초 이후 세계는 ‘민주주의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더구나 정보화시대의 개막으로 정보의 통제와 폐쇄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그리하여 사회 모든 부문에서의 공개성과 투명성이 거역할 수 없는 추세로 자리잡으면서, 이제 민주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역사의 마지막 발전 단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남한의 경우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발맞춰 국민의 투쟁 속에서 민주주의는 빠르게 진전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 그 다음 단계인 ‘실질적 민주주의’의 단계에는 충분히 들어서지 못했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단계에서도 보완돼야 할 점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당정치와 의회정치를 선진화시키기 위한 개혁이 계속 추진돼야 하고 선거제도와 관행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또한 엄정한 법치주의에 입각해 행정부패와 정치부패를 없앰으로써 깨끗한 정부를 구현하고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신뢰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정부와 정치권은 법치주의의 기초 위에서 질서와 기강을 바르게 튼튼히 세워야 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기능을 강화함으로써 국민복지를 실질적으로 향상시켜야 할 것이다.

북한의 경우 ‘민주주의의 르네상스’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우리는 북한의 동포들도 언젠가는 반드시 민주주의를 향유해야 한다고 믿으며 북한 스스로의 노력으로 개방과 개혁의 길을 열어갈 것을 기대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

셋째, 문화주의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흔히 말한다. 21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세계는 부국강병을 뼈대로 한 하드 파워(hard power), 곧 경성국가(硬性國家)의 시대로부터 문화를 뼈대로 한 소프트파워(soft power), 곧 연성국가(軟性國家)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여기서 문화라고 할 때, 교육 학문 예술 과학 기술 등 인간의 이성적 및 감성적 능력의 창조적 산물에 연관된 분야들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 겨레는 문화창조력이 뛰어났음을 자랑해 왔다. 수준 높은 문화국가로 뛰어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지녔다고 자부한다. 실제로 문화의 여러 부문들에서 우리 겨레는 세계적 인재들을 배출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천박한 저질문화가 여전히 지배하는 측면이 적지 않음을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이 점을 극복하면서 우리 겨레는 우리 겨레 고유의 문화능력이 발휘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무슨 ‘민족고유의 문화’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겠으나,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이며 가장 국제적인 것이 가장 민족적이라는 명제를 언제나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똑같은 취지에서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관용을 중시해야 한다. 다른 문화들과의 대담하면서도 광범위한 교류를 통해 우리의 문화는 훨씬 더 풍성해지고 힘을 얻게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취지에서 교육의 내용과 형태가 정부의 재정지원 확대를 통해 긍정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문화주의 시각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남북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동질성을 자랑해 온 한민족의 문화가 남북분단이 반세기를 경과하게 되자 차차 이질화(異質化)의 길을 걸어왔다는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남북 사이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일제 치하에서 온갖 탄압을 견뎌내며 자주독립을 지향하던 선각자들이 민족 앞에 제시한 3대 목표는 새 세기에도 민족의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의 거대한 횃불은 확실히 남북과 해외를 통털은 우리 배달겨레 모두를 정보화와 세계화의 21세기에도 민주번영과 평화통일의 새 세계로 이끌어 줄 것이다.

김학준<편집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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