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훈 前총리-사할린동포 오창록씨 감격재회

  • 입력 2000년 3월 27일 20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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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배, 이제 모든 걱정일랑 접고 고국에서 편히 여생을 보내세요.”

“영훈아, 내 생전 이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만주 건국大 선후배사이▼

두 사람은 반세기를 뛰어넘은 우정의 감회를 되새기며 맞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사동의 사할린 한인아파트 104호.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단의 일원으로 56년 만에 ‘귀향’의 꿈을 이룬 오창록(吳昌祿·80)씨의 주름이 깊게 팬 얼굴을 바라보던 강영훈(姜英勳·78·전국무총리)세종재단이사장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두 사람은 일제 치하 만주국의 정부 관료를 배출하기 위해 창춘(長春)에 설립된 건국대(建國大) 재학 시절 절친했던 선후배 사이. 전교생 1000여명중 대다수인 일본과 중국 학생들 틈에서 오씨는 정치학과(1기)에, 강이사장은 경제학과(2기)에 동료 유학생 100여명과 함께 재학중이었다.

“말과 글까지 빼앗긴 암울한 시절, ‘힘을 키우자’는 일념 하나로 유학길에 올랐지요.”

이역만리 유학 생활의 외로움을 두 사람은 친형제 이상의 우애로 이겨 나갔다.

▼44년 일제징집때 헤어져▼

1944년11월. 두 사람의 운명이 갈렸다. 패색이 짙어 가던 일본이 초급장교 양성을 위해 대학생들을 강제 징집하기 시작한 것.

‘침략 전쟁의 희생양으로 생을 마감하는가.’ 징집 영장을 받는 순간 두 사람은 ‘죽음’을 절감했다.

각각 사할린과 일본의 훈련소로 떠나기 직전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말만 되뇌었다.

훈련 도중 해방을 맞은 두 사람은 굳은 재회의 다짐을 이룰 것으로 믿었지만 패전 후 일본은 사할린에 남겨진 오씨를 비롯한 4만여 한국인의 송환을 철저히 외면했다. 오씨의 망향의 세월은 반세기를 넘겼고 ‘모든 것이 이대로 끝나는구나’하는 체념에 오씨는 몸을 떨어야 했다.

▼오씨 이달초 영주귀국▼

두 사람의 극적인 재회는 헤어진 지 49년만인 1993년8월에 이뤄졌다. 이역만리에 홀로 남은 선배의 가혹한 운명을 안타까워하던 강이사장은 당시 한국적십자사 총재로서 사할린 동포지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수소문 끝에 선배의 생존 사실을 확인하고 현지로 달려간 것. 일흔을 훌쩍 넘긴 두 사람은 재회의 감격에 목이 메어 “우리 약속을 지켰구나…”라는 말만 되뇌며 헤어질 때처럼 부둥켜안았다. 이후 한일 정부간 합의에 따라 사할린동포 귀국 사업이 본격화되고 이달 초 사할린 한인아파트가 완공되면서 오씨는 400여명의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귀환의 기쁨을 맞았다.

“선배님,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됩니다. 아직 나눌 얘기가 산더미같은데…” “이렇게 찾아줘서 고마우이 고마우이.”

비정한 세월에 가로막혀 못 나눈 우정의 회포를 단번에 풀려는 듯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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