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일본의 가부키(歌舞伎)가 미국의 링컨센터에서 공연됐을 때 뉴욕에 진출해 있던 일본의 기업이란 기업은 모두 나서서 법석을 떨었다.
그 당연한 결과로 일본의 전통문화는 뉴요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관심을 끌었고 그 뒤 가부키는 세계 곳곳의 유수한 극장에서 초청을 받아 공연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미국에서는 일본 붐이 일었고 특히 일본의 음식문화가 자리를 잡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 고전하는 한국 뮤지컬 ▼
작년에는 「쇼군」이 뮤지컬로 같은 무대에 올려진 적이 있다. 「쇼군」은 일본 작가가 쓴 것도 아니고 제작자도 미국인이었으나 이 때도 자동차 메이커 도요타가 후원해 연일 뉴욕의 매스컴을 광고로 뒤덮었다. 단순히 배경과 소재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일본 기업의 안목이 놀랍고도 부럽다.
그런데 며칠 전 국내 일간신문을 보니 같은 장소에서 우리의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가 「마지막 황후」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갖게 되었는데 어떤 기업도 지원해 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출연자 전원이 출연료도 없이 무대에 서고, 정부가 없는 돈을 1억원이나 지원했지만 대관료와 경비도 안돼 운영위원들이 빚을 얻어 꾸려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 알다시피 명성황후는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당한 민비의 시호이다. 이른바 「민비시해사건」으로 알려진 그 사건이 8.15에 맞춰 링컨센터의 무대에 올려진다는 것은 문화적이기에 앞서 역사적으로도 뜻깊은 일이다.
당시 일본의 호도에 의해 이 사건을 우리 내부의 분란, 혹은 권력투쟁 정도로만 알아온 미국인들에게 무대위에서 장엄하게 펼쳐지는 역사의 진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일 것이다.
거기에다 국내 초연에서 본 바로는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현재 뮤지컬다운 뮤지컬을 만들어내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뿐이라 해도 좋을 만큼 뮤지컬은 종합적이고 고급스러운 예술장르이다.
일본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그 분야에 돈을 퍼부어 오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만약 「마지막 황후」가 뉴욕에서 성공한다면 우리 나라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뮤지컬다운 뮤지컬을 만든 나라가 될 것이다.
▼ 어려울수록 과감히 ▼
한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위해 말없는 보증이 되어 준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기업가들에게서 자주 듣는 얘기 가운데 하나는 우리 제품의 우수한 품질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문화적 보증이 없어서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88서울올림픽 등으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 제품의 문화적 근거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외국인이 많다고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실은 가장 적합한 때라는 말이 있다. 이미 「마지막 황후」의 기획단과 중요 출연진은 미국으로 떠났지만 공연 때까지는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우리 기업들이 지금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과감해야 한다는 역설(逆說)도 있을 수 있다. 장사가 조금 된다고 해서 될 데 안될 데 가리지 않고 마구 퍼대던 그 인심은 다 어디 갔는가.
이문열(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