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의약분업]'의사처방 약사조제'는 생활관습

  • 입력 2000년 4월 3일 19시 22분


《‘웬만한 항생제는 아예 듣지도 않고 약은 으레 한움큼씩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현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의약품 오남용 실태가 이제 국민 건강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바로 의약분업이 이뤄져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약분업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정부당국과 현실적 미비점을 지적하는 의사들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새 제도 시행이 큰 진통을 겪고 있다. 의약분업이 정착된 선진국의 사례를 통해 의약분업의 쟁점과 바람직한 해결방향을 모색하는 상중하 시리즈를 마련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주도인 토론토시 중심가에 자리잡은 마운트 시나이 병원. 358개의 병상을 갖춘 산부인과 및 암 질환 종합병원인 이곳에선 하루에만 20만건이 넘는 약품의 처방이 이뤄진다.

이 병원에서는 환자에 대한 약품의 처방과 배분이 ‘유니트 도스 시스템’이라는 체계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의사는 진료와 처방을 담당하고 약사는 처방전에 따라 조제하며 간호사는 처방약이 제대로 환자에게 전달되는지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외래 환자를 위한 약품 전달 체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 병원 약국장인 빌 윌슨은 “약사는 의사의 처방전대로만 조제하며 임의 조제는 상상할 수도 없다”며 “대신 약사는 약품의 구매, 재고관리, 의약품의 분배 및 신약에 대한 연구, 약품의 부작용에 대한 모니터 등 약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윌슨은 “다만 의사가 2종 이상의 약을 처방했는데 이들 두 가지 이상의 약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을 경우 이런 의견을 의사에게 전달한다”며 “이때도 담당의가 원래의 처방전을 고집하면 그대로 따르되 담당 의사가 약사의 견해를 무시했다는 사실을 적시해 만약에 발생할지도 모를 약화 사고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의약분업 실시를 앞두고 의사와 약사간 쟁점이 되고 있는 대체 조제와 관련, 캐나다 미국에서는 동일 성분에 한해 대체 조제를 100% 허용하고 있다.

실례로 의사가 항생제인 아목시실린(화학물질명)을 처방할 경우 약사들은 아목시실린의 오리지널 약품인 아목실이 아니라 다른 복제품을 환자에게 내줘도 상관없다. 약효는 같고 약품값이 저렴해 보험 재정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정부나 보험회사는 복제품 사용을 권장한다. 물론 대체 조제의 허용 범위는 정부가 정한 ‘약효 동등성리스트’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 국가에서 의사와 약사의 역할을 구분하는 의약분업은 수백년동안 내려온 일종의 생활 관습이기 때문에 영어에는 의약분업이란 용어 자체가 없다. 중세 말기 유럽, 성직자들이 수행해 온 의사 조제사 일이 세분화하기 시작한 것이 의약분업의 시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중 법제화를 했든 안 했든 의약분업을 시행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뒤늦게 의약분업을 도입한 일본은 의약분업 시행률이 35%에 불과해 실패 사례로 꼽힌다.

정부가 의약분업을 하려는 목적은 선진국형 의료 체계를 도입하려는 것 외에 우리의 의약품 오남용이 국민 건강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작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의약품 사용 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 의료보험 진료 환자에 대한 항생제 처방 비율은 58.9%로 세계보건기구(WHO) 권장치인 22.7%보다 배가 높다. 반면 항생제 사용 적합률은 평균 67.4%에 불과해 나머지는 감염에 대한 뚜렷한 확증 없이 예방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사제 오남용도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주사제 처방 비율은 56.6%로 환자의 절반 이상이 일단 병원에 들르면 주사를 맞는 셈이다. WHO의 주사제 권장치는 17.2%.

병원에서 처방받는 의약품의 수는 외래환자가 4.2종, 입원 환자는 6.3종으로 WHO 기준인 1∼2종에 비해 훨씬 많은 실정이다. 문자 그대로 ‘한 움큼’의 약을 먹는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아난데일에서 개업하고 있는 의사 서진우박사는 “내 경우 주사제 처방 비율은 1% 미만이다”며 “주사제는 약효가 신속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투약 과정에서 인체에 치명적 손상을 줄 우려가 있어 선진국에서는 잘 처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토론토·워싱턴〓정성희기자>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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