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기업 “물량 확보” 직원 급파… 日업체 “팔고 싶지만 정부 눈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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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경제보복 파문]반도체 3개 소재 日수출규제 첫날

“당신들도 한국에 수출을 못 해 재고가 쌓이면 피해가 크지 않나. 극적으로 사태가 해결될 수 있으니, 일단 수출 신청이라도 해보자.”

“우리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팔고 싶지만 정부가 못 팔게 하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4일 오전 한국 반도체 기업 일본법인 소속의 A 씨와 거래처인 일본 반도체 기업 직원 B 씨가 나눈 대화다.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빌미로 한국 수출 규제를 시작한 첫날 일본 도쿄에서 펼쳐진 풍경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등 국내 기업들은 이날 일본 내 반도체 소재 업체들과 다각도로 접촉해 물량 확보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일본에 급파한 구매팀 직원뿐 아니라 현지 일본법인 인력도 총동원됐다.

일본이 수출규제 품목으로 지정한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소재는 재고가 1∼3개월 치에 불과하다. 특히 에칭가스는 장기 보관이 어려워 재고가 1개월 분량이 채 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최악의 경우 한 달 후에 반도체 생산 차질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일부 업체는 규제가 시작된 이날도 일본 업체들을 설득해 수출신고서를 일본 경제산업성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가 통상 90일이 걸리는 심사 절차를 계속 지연시키거나 수출을 불허할 수도 있지만, 한일관계가 호전돼 규제가 느슨해질 경우 한시라도 빨리 조달하기 위한 조치다. 한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도 상당해 이번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단할 수 없다”며 “일단 수출 서류를 제출이라도 해봐야 어떻게 거부되는지도 알 수 있고, 모든 시나리오에 대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업체들은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방침을 밝힌 1일부터 물량 추가 확보를 위해 일본 기업들을 필사적으로 접촉했지만 한정적인 수량만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소재 기업을 설득해 수출 계약을 맺었어도 사흘 동안 모든 절차를 다 밟기 어려웠다. 물리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만에 공장을 둔 일본 업체가 있다는 첩보가 있어 소재 확보를 타진했지만 허탕을 치기도 했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애플, 퀄컴 등 고객사에 “현재 수준의 생산량을 지속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추후 변동사항이 발생하면 추가 정보를 다 제공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일일이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한 행사에서 “정부와 분야별로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는 한국 반도체 업체와 거래하는 일본 기업과 글로벌 전자 기업들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아사히신문 3일자 보도에 따르면 일본 소니는 TV 생산 중단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 업체의 반도체 및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 소니의 55인치 이상 고급 TV 생산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소니 측은 “이번 사태가 어디까지 갈지 예측할 수 없어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TV 생산을 못해 상품 재고가 바닥날 것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애플도 아이폰 상위 기종 중 일부 제품에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OLED 패널이 탑재돼 있어 피해가 우려된다.

일본 기업들은 자체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에칭가스 제조업체인 스텔라화학도 싱가포르 공장을 활용한 대체 수출 방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일본 정부의 이번 수출규제로 중국이 가장 이익을 볼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와세다대 경영대학원 오사나이 아쓰시(長內厚) 교수는 본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한일 기업이 무역 분쟁으로 함께 무너져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면 결국 승자는 중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근형 noel@donga.com·최지선 기자

#강제징용 배상#반도체#일본 수출 규제#삼성전자#sk하이닉스#lg디스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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