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처음엔 ‘독도편입’ 꺼리다 러-일전쟁 승리위해 생각바꿔

  • 입력 2005년 6월 10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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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동아일보 자료 사진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이 러일전쟁 승리를 위한 군사적 목적에 따라 이뤄졌음을 밝혀낸 논문을 발표했다.

▶본보 6월 8일자 A2면 참조

최 교수는 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역사학회 특별강연 발표 논문 ‘러일 해전과 일본의 독도병합’에서 러-일전쟁의 전황(1904년 2월 8일∼1905년 9월 5일)과 일본의 독도 편입과정(1904년 9월 29일∼1905년 2월 22일)에 관한 일본 측 자료 등을 비교해 이같이 밝혔다.

1904년 8월 30일 러시아 발틱함대의 동진이 결정되자 일본군령부는 9월 24일 독도에 망루 설치 조사를 명령했다. 독도 근해에서 물개잡이를 하려던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가 닷새 후인 9월 29일 내무성에 ‘‘리양코도(독도) 영토편입원’을 제출했다. 그러나 내무성 지방국장은 “한국 영토라는 의문이 드는 황막한 일개 불모의 암초를 얻는 대가로 여러 외국에 우리가 한국 병탄 야심이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할 수 있다”며 접수를 거부했다.

그러자 나카이는 이를 외무성 야마자 엔지로(山座圓二郞) 정무국장에게 가져갔고, 야마자는 “시국이 그 영토 편입을 급무(急務)로 한다”며 농상무성 수산국장, 해군성 수로국장 등과 협의해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을 개발했다. 그리고 나카이에게 영토편입원을 다시 제출하도록 사주했다.

최 교수는 “어민 한 사람의 생업, 그것도 장차의 생업을 위해 영토편입원을 접수했다는 일본 측의 설명은 그야말로 양두구육(羊頭狗肉)이나 마찬가지”라며 “당시 접수 이유에도 ‘(독도에) 망루를 건축하고 무선 또는 해저 전신을 설치해 적함을 감시하는 데 극히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1905년 1월 1일 일본 육군이 중국 뤼순(旅順)을 점령해 대한해협이 결전장소로 확정되자 일본 정부는 열흘 후인 1월 10일 비밀공문 형식으로 영토편입원을 각의에 제출했고, 각의는 1월 28일 이를 통과시켰다.

이 시기는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도쿄에서 일본 해군 수뇌와 작전을 협의하던 기간이었다. 도고가 일본 전함대의 대한해협 결집을 명령한 것이 1월 21일이었다.

이어 2월 22일 도고는 임전태세 완비를 선언했고 다음날인 22일 지방 정부의 관내고시로 독도 영토편입을 고시한 ‘시마네(島根) 현 고시’가 이뤄졌다.

최 교수는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를 쟁탈 대상으로 한 침략전쟁이었다”면서 “따라서 일본의 독도 병합은 청일전쟁 이후 폭력과 탐욕으로 일본이 탈취한 지역은 원래 소유국에 반환해야 한다는 1943년 카이로선언에 의해 무효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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