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TV 오락 프로그램 '자막 공해'

  • 입력 2000년 8월 23일 18시 35분


70여분에 1024회(MBC ‘목표달성 토요일')(사진), 60여분에 1022회(SBS ‘기분좋은 밤’). 이는 해당프로에서 프로그램 한회당 사용하는 자막의 횟수다. 불과 4, 5초만에 1번씩 TV 화면에 자막이 지나간다는 얘기다.

방송진흥원 프로그램분석팀은 최근 TV 3사 오락프로 20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오락프로의 자막이 거의 ‘공해’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대부분의 오락물에서 자막 처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조사는 자막의 횟수도 문제이지만 내용도 저질 시비를 불러 일으킬만한 게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콧구멍 속에 팍 다 꽂아 뿐다’ 등 속된 표현들을 친절하게 자막으로 처리하고 있다.

자막(Super)은 출연자의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녹음이 잘 되지 않는 상황에서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 수단이다. 물론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 방송의 경우는 자막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TV 3사 오락물의 자막은 이처럼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 이제는 연출자가 억지로 시청자들의 웃음과 흥미를 끌어내기 위한 주요 제작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 문제다.

방송진흥원에 의 조사에 따르면 연출자가 화살표 물음표 그림 등을 동원해 화면에 ‘장난’을 치는 것도 적지 않고 상황 설명을 ‘바보 아니야’ 등으로 과대 포장해 시청자들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를 빼앗고 있다. 또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자막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다반사로 나타났다.

방송진흥원의 주창윤 박사는 “오락물의 과도한 자막은 화면의 집중도를 떨어트리는 것을 넘어 시청자들에게 ‘이런 경우이니까 웃어라’하고 지시하는 등 시청자들을 아예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자막을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심지어 보도나 탐사 프로에서 외국인을 인터뷰했을 때도 자막보다 더빙을 원칙으로 한다. 자막이 화면을 가려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왜곡시킬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KBS 홍경수 PD는 서울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석사논문에서 “한국 방송계에서는 시청률에 고민하는 프로일수록 자막을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며 “자막이 적은 비용으로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것으로 부각되면서 경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허엽기자>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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