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과장, 당신의 손이 더 필요해요”

  • 입력 2006년 7월 1일 0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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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발 과장’이 퇴임해? 그럼 앞으로 영문 자료는 누가 만들지?”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에서 열린 정년퇴임식을 앞두고 만 58세가 돼 은행을 떠나는 12명의 명단이 내부 전산망에 오르자 몇몇 직원은 상당히 술렁거렸다.

행사의 주인공 가운데에는 영문 번역사로 활약한 벽안(碧眼)의 외국인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국 조사총괄팀 별정직 존 발슨(John R. Balson·사진) 씨.

그는 연세대 영문학과에서 시간강사를 하다 1988년 한은에 들어와 18년을 일했다.

한은이 발간하는 모든 영문 자료는 그의 손을 거친다. 외국 중앙은행에 보내는 문서, 국제회의 자료, 언론에 제공하는 영문 보도 자료를 만드는 것도 그의 몫이다.

적지 않은 일감에도 싫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은 성실함과 부지런함 때문에 한은에서 그는 ‘발 과장’ 또는 ‘발, 손’으로 통한다.

발슨 씨는 퇴임식에서 감사패와 기념품을 받아들고 “아직 일한 지 하루 이틀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라며 퇴임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국 서섹스대와 에든버러대에서 사회인류학, 응용언어학을 전공했다. 이후 유로 중앙은행법을 공부해 한은 일이 전혀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전에도 없는 전문용어가 가득한 문서를 받아들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컴퓨터를 쓰기 전이라 글씨도 알아보기 힘들었고요. 어찌나 악필(惡筆)이 많던지….”

이를 악물고 버텨 이제는 ‘도사’가 됐다. 가끔은 한글로 된 서류에서 오류를 잡아내기도 한다고 한 직원은 전했다.

역시 외환위기 때가 가장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다고 돌이켰다.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외환보유액이 바닥났을 때다.

“1997년 하반기에는 하루 평균 14∼16시간씩 일했던 것 같아요. 40시간 연속 책상 앞에 붙어 있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탰다고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대학 강사인 한국인 부인(인테리어 디자이너)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 가족에 대해 더 묻자 “프라이버시”라며 말을 아꼈지만 “맞벌이를 하는데도 아들 교육비 대기가 빠듯할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저러나 ‘발 과장’이 퇴임하면 어떻게 하나?

당분간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한은은 ‘이만한 사람이 없다’는 판단으로 발슨 씨를 용역 계약직으로 더 붙잡기로 했다.

김재천 한은 조사국장은 “오랫동안 함께 일해 이제는 없으면 허전할 것 같다”며 “그가 더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고 말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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