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황인학/경영권 방어대책 시급하다

  • 입력 2003년 12월 18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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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간판기업들이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무력하게 노출돼 있어 경영권 방어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비중은 시가총액 기준으로 삼성그룹 54.1%, SK 및 현대자동차그룹은 각각 41.5%와 44.0%다. 10대 그룹(공기업 제외) 전체로는 44.4%를 점한다. 외국인투자자들이 작정하고 힘을 모으면 경영권을 장악하거나 경영권을 위협하며 비싼 값으로 보유주식을 되팔아 단기에 큰 이익을 남기는 그린 메일링(green mailing)이 항시 가능한 상황이다.

▼외국자본 ‘적대적 M&A’ 속수무책 ▼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M&A는 막연한 기우(杞憂)가 아니다. SK㈜의 외국계 주주인 소버린은 내년 3월 정기주총에서 SK㈜의 경영권 교체를 시도할 것이라고 한다. 지분구조상 성공가능성도 높다. 소버린은 보유주식 14.99% 외에 우호지분까지 더하면 최소 30% 내외의 지분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한다. SK㈜ 경영자측 지분은 모두 합해서 35% 정도인데, 이중 10.4%는 의결권 행사가 불가능한 자사주이기 때문에 현 경영자측이 주총에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 지분은 소버린보다 적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버린이 전략적으로 행동해 자사 지분 중 5%를 우호주주에게 매각해 지분을 10% 미만으로 낮추면 현 경영자측의 경영권 방어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 경우 SK㈜는 더 이상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공정거래법상의 출자총액규제 대상이 되고, 현 경영자측 지분의 일부분이 추가적으로 의결권을 제한받게 되기 때문이다.

정부 규제로 인해 국내기업들은 국제자본과의 경영권 경쟁에서 이처럼 불리한 위치에 있다. 만약 소버린이 SK㈜의 이사회를 장악한다면 1768억원을 투자한 사모펀드가 자산규모 47조원에 이르는 국내의 대표적인 에너지 통신그룹을 M&A 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적대적 M&A가 항상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적대적 M&A는 경영진이 기업 가치를 높이지 못하면 경영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압력으로 작용해 경영진의 분발을 촉구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국내기업들은 지나치다싶게 그린 메일링이나 적대적 M&A에 노출돼 있는 반면 방어수단은 사실상 전무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외국자본에는 적대적 M&A를 전폭 허용했지만 국내 대기업에 대해서는 출자총액규제와 금융회사의 의결권 제한 등의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경영권 경쟁에서 국내기업을 불리하게 만든 것은 분명한 역차별이다.

지나친 경영권 위협은 소모적인 경영권 분쟁을 야기한다. 경영진은 멀리보고 투자하는 기업가정신을 발휘하기보다는 주가 관리에만 관심을 쏟는 등 주주 영합적이고 근시안적인 경영행태를 보이게 된다. 그 결과 기업의 경쟁력은 점점 떨어지며, 사회적으로는 과소투자가 발생하고 고용여력이 잠식돼 국민경제의 미래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더욱이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주체가 자본 이득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투기적 성격의 자본이라면 그 부정적인 파급효과는 더욱 심각할 것이다.

▼출자총액제한 국내기업에만 족쇄 ▼

지나친 경영권 위협은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에 적대적 M&A를 도입한 나라는 차등의결권 발행이나 포이즌 필(Poison Pill·적대적 M&A로 기업이 매수되더라도 기존 경영진의 신분을 보장할 수 있도록 사전에 필요한 장치를 해 놓는 것) 등 다양한 방어수단을 허용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게 보통이다. 최근 오라클이 피플소프트의 경영권을 공격하다 실패한 사례에서 보듯 주주 자본주의의 본산이라 할 미국에서도 적대적 M&A가 마냥 자유로운 것만은 아니다.

외국인 투자비중이 이미 40%를 넘어선 우리도 더 늦기 전에 무차별적인 경영권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국내기업만 구속해 지배권시장에서의 공정경쟁을 저해하는 한편으로 기업의 발전적인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는 폐지해야 마땅하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조정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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