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성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은 좀 더 평등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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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핍 윌리엄스 지음·서제인 옮김/580쪽·1만8500원·엘리

1915년 7월 10일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에 참여한 이들이 옥스퍼드대에 모였다. 책임 편집자인 제임스 머리(앞줄 가운데)의 딸 엘시(앞줄 왼쪽)와 로스프리스(앞줄 오른쪽)는 아버지를 도와 편찬에 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저자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을 가미해 소설을 썼다. 엘리·옥스퍼드대 출판국 제공
1915년 7월 10일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에 참여한 이들이 옥스퍼드대에 모였다. 책임 편집자인 제임스 머리(앞줄 가운데)의 딸 엘시(앞줄 왼쪽)와 로스프리스(앞줄 오른쪽)는 아버지를 도와 편찬에 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저자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을 가미해 소설을 썼다. 엘리·옥스퍼드대 출판국 제공

옥스퍼드 영어사전. 수록된 단어가 약 40만 개에 달하는 세계 최대 사전이다. 1857년 편찬이 시작된 뒤 1928년 초판 완성까지 71년이 걸렸다. 1000여 명의 언어학자가 여기 동원됐다. 높은 권위 덕에 일반인들뿐 아니라 언어학자들도 찾아보는 사전이다. 세월이 흘러 개정을 거듭하며 ‘makkoli(막걸리)’ ‘ondol(온돌)’ 등 한국어도 들어갔다.

그런데 이 사전에 성차별적 표현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단어 ‘rabid(과격한)’ ‘nagging(잔소리하는)’의 용례로 각각 ‘feminist(페미니스트)’와 ‘wife(아내)’가 소개됐다는 것.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저자는 이 사실에 착안해 상상을 시작했다. 사전 편찬 과정에 여성이 많이 참여했으면 어땠을까. 그 여성들로 인해 성차별적 단어가 바뀌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이 상상은 한 편의 소설이 됐다.

저자 핍 윌리엄스
저자 핍 윌리엄스
1887년 5월 옥스퍼드대의 한 창고.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자인 아빠 곁에서 놀던 어린 소녀 에즈미는 테이블 아래로 굴러떨어진 쪽지를 줍는다. 쪽지에는 ‘bondmaid(여자 노예)’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어떤 단어가 영어사전에 들어가야 하는지 판단하는 일을 하는 아빠 몰래 에즈미는 재미 삼아 쪽지를 주머니에 넣는다. 에즈미의 장난으로 인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그 단어는 사라진다.

1896년 9월 에즈미는 첫 생리를 한다. 자고 일어나니 이불, 잠옷, 침대시트가 모두 빨갛게 물들어 있다. 비명을 질렀다. 피는 끈적였다. 아빠가 단어를 분류해 넣어 놓은 상자를 뒤졌다. ‘menstruate(생리하다)’라고 쓰인 쪽지에는 2개의 정의가 쓰여 있었다. 첫 번째는 ‘월경을 배출하다’였고, 두 번째는 ‘부정(不淨)하게 되다’였다. 이때부터 에즈미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왜 생리는 나쁜 뜻으로 쓰일까. 세상을 정의하는 단어는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이후 에즈미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을 돕는 조수가 된다. 당시 편집자의 대부분은 남성이었고, 여성은 보통 이들을 돕는 조수로 일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곁눈질로 배워 어떤 남성들보다 단어를 골라내는 데 기민한 에즈미는 일을 처리하며 세상의 불합리함을 마주한다. 에즈미는 여성 관련 단어들에 비하적인 표현이 들어 있는 현실과 싸운다. 성차별적 단어들을 조금씩 바꿔 간다.

소설이 오직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건 아니다. 저자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책임 편집자에 대한 책을 탐독했고 당시 문학 작품과 신문 기사를 뒤졌다. 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몇몇 여성의 이름을 찾았고 그들의 삶을 추적했다. 에즈미라는 허구의 인물이 겪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사전은 영어라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항상 현재 진행형인 작업”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성차별적 단어를 고치는 일은 현재도 계속돼야 하는 게 아닐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사전#책의 향기#페미니스트#성차별#여성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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