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킨 감독 “살해 협박에 촬영장에 보디가드”…관객은 15분 기립박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일 15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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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레반 아킨 감독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레반 아킨 감독
레반 아킨 감독(41)이 조지아의 첫 LGBTQ(성적소수자) 장편영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And Then We Danced)를 만들기로 결심한 건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조지아 국적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스웨덴에서 자란 그는 2013년 페이스북을 통해 조지아 수도 티빌리시에서 정교회 단체가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동영상을 접했다. 지난달 25일 국내 개봉한 이 영화의 아킨 감독을 서면으로 만났다.

“국가마다 혐오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동영상에서 본 것 만큼 심각한 수준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영상을 접한 뒤 부끄러움과 충격이 함께 찾아왔죠.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왔을까?’란 의문을 가졌고, 답을 찾기 위해 2016년 조지아로 떠났어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컷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컷
아킨 감독의 부끄러움을 발판 삼아 세상 밖으로 나온 영화는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문화가 뿌리 내린 조지아 국립무용단 소속 남성 무용수 ‘메라비’(레반 겔바키아니)와 ‘이라클리’(바치 발리시빌리) 간 사랑을 그렸다.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춤 연습을 하며 강하게 끌리지만 주변의 혐오와 편견에 무너진다. 영화는 2019년 프랑스 칸 영화제 ‘디렉터스 포트나이트’ 부문에 초청됐고, 관객들은 15분 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영화 제작 과정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임이 알려지자 촬영 허가를 받은 장소에서도 촬영이 불허됐다. 아킨 감독의 메신저로 살인 협박 메시지가 오기도 했다. 영화 제작에 협조한 조지아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이름을 엔딩 크레딧에서 ‘익명’(Anonymous)로 표기했다.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컷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컷
“장소 섭외가 불가능해지자 나중엔 장소를 섭외할 때 영화의 주제를 다른 것으로 거짓말 해야 했습니다. 살해 협박이 들어와 촬영현장에 보디가드들을 배치했고요. 매 순간 누군가 촬영현장에 들이닥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영화 소재를 결정한 뒤에는 조지아의 무용단들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진행했다. 무용단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면면이 영화에 반영됐다. 주인공 이름인 ‘메라비’도 실제 감독이 만난 무용수의 이름을 땄다.

“한 곳에 5일씩 머물기도 하면서 무용단 내부의 역학관계를 파악했어요. 동성애자임이 발각돼 국립무용단에서 쫓겨난 ‘자자’의 이야기도 제가 만난 무용수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 무용수는 영화에도 등장해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컷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컷
신인배우 겔바키아니는 정치적 항변으로 비춰질 수 있는 영화의 메시지를 춤을 통해 아름답고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전통이란 이름 아래 ‘위엄 있고 남성다운’ 민속춤의 동작을 지키도록 강요받는 무용단의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오디션 무대에서 보란 듯 자유로운 몸짓을 펼쳐 보이는 마지막 댄스 시퀀스는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혼을 담은 춤사위로 겔바키아니는 ‘스웨덴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굴드바게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컷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컷
“때론 소년 같지만 때론 아주 늙어 보이기도 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의 얼굴에 매료돼 캐스팅했습니다.마지막 장면에서 몇몇 스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레반의 즉흥적인 안무였어요. 그의 팔과 허리는 여성적 움직임과 남성적 움직임을 오가고, 조지아의 전통 춤도 그의 아름다운 해석에 따라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오갑니다. 그 순간 메라비는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죠.”

지난해 11월 트빌리시에서의 첫 상영에서 영화는 정교회 단체와 극우 정당의 반대시위에 부딪혔다. 영화는 단 3일만 상영관에 걸렸고, 매 상영관마다 30명의 무장 경찰과 무기 탐지기가 배치됐다. 위험을 감수하고 영화관을 찾은 관객에 힘 입어 영화는 무사히 상영을 마쳤다. 6000장의 티켓은 10여 분 만에 매진됐다.

“아직도 영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지만 전 괜찮습니다. 조지아는 물론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폴란드 등 수많은 국가의 젊은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낸 응원의 메시지가 큰 힘이 됐거든요. 이러한 젊은 세대들이 조지아를 비롯한 각국의 희망이자 미래입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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