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현장검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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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검증 ―홍정순(1972∼)

그가 다녀간 것 같다 없는 나를 다행히 여겼을지도 모를 일 딱히 뭘 살 일도 없이 가게에 들러 날 분명히 찾지도 못하고 족대나 하나 사갔다는 그, 뭔가 예사롭지 않다
는 것을 남편이 눈치챘듯 배신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을 골랐다는 것을 감 잡았을지도 모를 일 그 자리 없길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대체 뭔 심사? 그인 것 같다 앙가조촘 철물점 담장의 꽃밭이나 보고 갔을지도 모를 일 동창들에게 내 안부나 훔치다가, 고향서 눌러앉아 철물점 아줌마가 돼 애가 셋이나 딸렸다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 죄짐에 미루다 지나가는 길에 혹시나 해서 들렀을지도 모를 일 담장 꽃밭 넝쿨장미 앞에서 한 대 태워 문 꽁초가 이것일지도 모를 일
애들과 마누라를 데리고 족대를 메고 어느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을라나 장미꽃 한 아름을 들고 교문에 와 학교를 들었다 놨던 그, 그가 다녀갔다 아들과 동명인 그 자식이


여성 화자와 남편과 다른 남자가 나오는 짧은 이야기다. 남자는 우물쭈물 여자의 안부를 묻다 가고, 남편에게 그걸 전해 들은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남편은 뭔가를 눈치챘겠지만, 남자 또한 남편을 한눈에 읽었을 것이다. 변심이라곤 모르게 생겼네, 하고.

그저 사람 좋은 사람이 원래 그녀의 스타일은 아니었나 보다. 모든 게 달뜬 꿈같은 시절이 있었고, “배신”이라고밖에 달리 말하기 어려운 어긋남이 있었겠지. 그녀는 직감으로 방문자의 정체를 알아챈다. 놀라고 들뜬 마음에 그의 흔적을 상상으로 더듬고, 그의 심리를 셈하고, 탐정처럼 담장 아래 떨어진 꽁초까지 세심히 살핀다. 이게 ‘현장검증’이겠지. 하지만 왠지, 그가 그녀에게 다시 나타난 것 자체가 현장검증 같기도 하다.

넝쿨장미가 옛날의 장미를 불러온다. 그가 옛날 애인이었구나, 하는 반전 뒤에 더 센 반전이 따른다. 헤어진 남자의 이름을 아들에게 씌운 마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이해하긴 뭘, 그냥 아, 그랬던 거구나 하면 되지. 인생이 그런 거지…. 그녀의 철물점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있다고 한다.

이영광 시인
#현장검증#시#홍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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