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몽환적 문장으로 그려낸 ‘원초적 사랑’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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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렐렘/나더쉬 피테르 지음/김보국 옮김/192쪽·1만3000원·arte

“얇은 담배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성냥개비로 담배 가루를 파낸다. 깔아둔 종이판에 담배 가루가 흩어진다. 들리는 것은 고요함뿐. 탁자 옆에 앉아 우린 이미 한 대를 피웠다.”(6쪽)

그들이 피운 것은 마리화나(대마초)였다. 주인공 ‘나’는 이별을 통보하러 애인 ‘에바’를 찾아간다.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애인이 건네준 마리화나를 입에 문다. 그러고 환각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소설은 그 환각을 불규칙적으로 줄바꿈하며 감각적이고 몽환적인 문장으로 옮겼다.

“느낌은 내 안에 있고, 광경은 내 밖에,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말해야 한다. 나는 너를 보고 있지만 너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볼 수 없는 리듬을 느낀다.”(39쪽)

헝가리어로 사랑을 뜻하는 ‘세렐렘(Szerelem)’의 저자 나더시 페테르(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꼽히는 헝가리의 대표 작가다. 그의 소설이 국내에 번역된 것은 처음. 소설 읽기의 즐거움은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대리체험에 있다. 마리화나가 명백히 불법인 우리나라에서, 사이키델릭한 도취 상태에 빠져 거품처럼 부유하는 사랑의 실체를 포착하는 것만으로 훌륭한 문학적 체험이 아닐까. 문학을 통해 맛보는 타락은 무죄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세렐렘#헝가리어#마리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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