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온갖 꽃향기 다 스러진뒤에야 비로소 인간의 향기가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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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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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시에 매혹되다/김풍기 지음/308쪽·1만4800원·푸르메

‘우리 형님 얼굴은 누구와 비슷했나/선친 생각날 때마다 형님을 보았었지/이제 형님 생각나면 어디서 뵈올까/의관을 갖춰 입고 냇물에 비춰봐야겠지.’(박지원, ‘연암에서 돌아가신 형님을 그리워하며’)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이 시는 ‘그립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움을 진하게 표현한다.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조차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연암은 23세에서 35세 사이에 모친, 조부, 부친, 누님을 차례로 여의었다. 이 시는 연암이 51세 때 유일한 기둥이었던 형님이 세상을 떠난 뒤 쓴 것이다. 한시(漢詩)는 절제와 축약의 예술이다. ‘그립다’ ‘힘들다’ 같은 감정은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행간에 숨긴다.

‘사람은 이제 산골 집의 문을 닫고/구름 또한 높은 봉우리로 돌아간다./뱁새 쉬지 않고 날아가나니/저 숲 속에 무슨 즐거움 있는 것일까.’(김창흡, ‘갈역잡영·葛驛雜詠’)

조선 후기 학자인 김창흡(1653∼1722)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사사(賜死)된 뒤 형들과 함께 은거했다. 깊은 산골 마을을 거닐던 그의 눈에 뱁새가 숲 속 보금자리를 찾아드는 것이 들어왔다. 돌아갈 곳 없이 숨어 떠도는 자신의 처지를 뱁새에 비유해 시에 담아냈다.

‘아무도 없이 혼자 마시는 것 그리 잘못은 아니지/술병 말랐다고 국화의 비웃음 살까 봐/책 잡히고 옷 잡혀서 술을 사왔네.’(신위, ‘국화’)

옛사람들은 꽃 핑계를 대며 풍류를 만들어냈다. 책의 질서정연함과 옷의 가식을 벗어던지고 술과 국화의 자연 세계로 스며드는 작자의 흥취가 어렵지 않은 언어로 표현됐다.

이 책은 중국, 고려, 조선시대의 옛 시들을 17개의 다양한 주제어로 분류해 정리했다. 시를 최상위 텍스트로 올려놓고 ‘공자 왈 맹자 왈’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담백한 에세이로 옛사람들의 생활상, 관습과 제도, 감성 등을 다양하게 풀어내며 한시를 얹는 형식이다. 차(茶), 여행, 이별 같은 일반론으로 시작해 이를 표현한 옛 시를 소개한 뒤 그 뒷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준다.

옛 시의 풍취에 더한 저자 자신의 관조 역시 책 곳곳에 담아냈다. ‘그를 맞아 잘 대접하다 보면 병은 어느새 친밀한 벗으로 변한다. 그 벗이 나를 죽음으로 데려갈 수도 있지만, 내 삶의 차원을 전혀 다른 곳으로 안내할 수도 있다.’ ‘온갖 꽃향기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인간의 향기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옛시 읽기의 즐거움’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등을 쓰고 ‘소설 옥루몽’ ‘열하일기’ 등을 번역했다. 이 책은 한시와 옛글에 취해 지낸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맑은 술 한잔과 같다. “그들(옛 시)은 내게 무성한 녹음이 되어주었고, 마음속을 고운 단풍으로 물들여주었다…그에게 매혹된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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