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화가 홍정희 씨 6년 만의 개인전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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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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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색채 깊은 사유, 울림도 깊더라

색면 추상의 대표 화가인 홍정희 씨의 ‘나노’ 시리즈 작품들. 강렬한 원색의 화면 안에서 삼각형과 꽃문양이 증식되면서 화면에 풍부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갤러리 현대 제공
색면 추상의 대표 화가인 홍정희 씨의 ‘나노’ 시리즈 작품들. 강렬한 원색의 화면 안에서 삼각형과 꽃문양이 증식되면서 화면에 풍부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갤러리 현대 제공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 빌딩 안에 자리한 화가 홍정희 씨(66)의 작업실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물감통과 온갖 재료가 어지럽게 뒤섞인 공간. 그 속에서 묘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꽃분홍, 개나리, 연초록, 오렌지 등 현란한 색채들이 그림 밖으로 뛰쳐나올 듯 강렬한 존재감으로 유혹한다.

‘색채의 연금술사’라고 불리는 홍 씨가 6년 만에 신작을 선보인다. 그가 추구해온 색면 추상의 세계를 ‘나노’ 시리즈로 변주한 작품을 볼 수 있다. 바탕색과 대비되거나 비슷한 색으로 꽃, 집, 산 등의 기호적 문양을 반복 배치한 신작들이다. 예전보다 단순한 형태에 더 풍부한 감성과 표정을 담아냈다. 3∼2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현대 강남. 02-519-0800

또 다른 중진화가 서용선 씨(60)가 9일∼4월 10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신관과 본관에서 전시를 연다. 서울대 교수를 그만둔 뒤 폭발적 에너지를 작업에 쏟아내 지난해 인물과 풍경을 소재로 서너 차례 전시를 열었다. 이번엔 미국 호주 일본을 오가며 인상 깊게 마주쳤던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02-720-1524

젊은 작가들보다 치열하게 작업하며 자기 세계를 흔들림 없이 지켜온 두 중진이 발표하는 색면 추상과 구상회화. 개성은 달라도 회화의 깊이와 뚜렷한 철학을 공통분모로 삼아 울림을 전하는 작품들이다.

○ 색채의 깊이


날마다 좁은 공간에 틀어박혀 그림만 파고든 홍 씨의 손은 투박하고 거칠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색을 찾기 위해 직접 안료를 사용해 물감을 만들고, 톱밥 같은 이물질을 혼합해 캔버스 표면에 오톨도톨한 질감을 살려낸다.

이렇게 완성된 그림에선 색채의 깊이가 핵심 요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록달록한 한복과 단청 등 전통 문화를 접하면서 한국적 미의식에 눈떴고 색의 마법에 빠져들었다. 결국 ‘회화가 그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고 회화 자체로 남으려는 여정’에 매료된 그는 1973년 첫 개인전 이래 물감의 물질성과 색채의 존재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작업에 집중해 왔다.

붉은 색조의 추상회화에 집중했던 초기와 달리 이번 신작에선 큰 문양을 반복적으로 활용해 캔버스에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감과 부드러운 운율을 만들어낸다. 표면을 안료로 덮어가면서 꽃, 산, 집 등을 단순화한 이미지를 변주한 그의 작업에서 자연 속의 봄보다 한발 앞선 봄의 소리가 느껴진다.

○ 인문적 깊이

화가 서용선 씨의 ‘시선의 정치’전에서 선보이는 ‘카페에서’.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화가는 이번 전시에서도 도시문명이라는 현대적 삶을 선택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양하게 채집해 보여준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화가 서용선 씨의 ‘시선의 정치’전에서 선보이는 ‘카페에서’.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화가는 이번 전시에서도 도시문명이라는 현대적 삶을 선택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양하게 채집해 보여준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미술계 시류에 관계없이 표현주의적 구상회화를 고집스럽게 파고든 서 씨의 전시 제목은 ‘시선의 정치’. 이번 전시를 넘어서 ‘현실의 모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굳게 믿는 화가의 관심을 총체적으로 은유한 제목이다.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예민한 더듬이는 언제나 이 시대의 삶이 갖고 있는 보편적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소설을 좋아한 화가는 동시대를 호흡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작품으로 표현해 왔다. “내 작업의 중심은 인간이다. 그중에서도 이 시대의 인간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관심사다.”

언어 대신 시각 이미지를 통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치는 화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인문학적 깊이를 그 안에 녹여내 은근하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를 길어 올리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갖는 미덕이다. 이번 전시에선 그 시선을 국내에서 국외로 확장해 현대성을 상징하는 도시인을 그린 40여 점을 내놓는다. 거친 빔이 노출된 뉴욕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거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며 현대인의 보편적 일상에 공감하게 되고,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을 그린 작품에선 우리의 분단 현실이 떠오른다.

물감과 색채가 그 자체로 생생한 삶을 살아가는 작품과 이 시대의 정치 역사 사회가 한데 녹아든 도시의 이야기를 압축해 놓은 그림들. 중진의 열정과 힘을 보여주는 두 전시는 갤러리 나들이를 채근하며 그림이란 무엇인지 새삼 되새기게 한다. 회화의 미덕은 아이디어와 손재주가 아닌, 정신과 사유의 깊이에 있음을 일깨우면서.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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