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 일제에 시해당한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여성을 그린 세밀화가 발견됐다. 이 그림은 시해(을미사변) 직후 러시아 신문에 실린 것으로 명성황후 사진과 초상화를 둘러싼 진위 논쟁의 불씨를 살릴 것으로 보인다.
○ 115년 만에 공개된 그림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단장 임채완)은 1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된 일간지 노보예브레먀 1895년 10월 21일자 별지 8쪽에 실린 명성황후 세밀화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이 세밀화는 가로 5cm, 세로 8cm 크기로 밑에는 ‘시해당한 조선의 황녀’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세밀화 속 명성황후는 중국식 복장과 머리장식을 하고 외모가 다소 서구적이다.
세계한상문화연구단은 이 세밀화가 명성황후를 만났던 러시아 공사 부인 등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허성태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교수는 “당시 황실 법도상 외부 화가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없는 만큼 목격자가 전한 인상착의를 기초로 그려진 것 같다”며 “당시 이 그림을 그린 러시아 화가가 한복을 보지 못해 명성황후가 중국식 복장을 한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명성황후가 다소 서구적 외모로 그려진 것은 당시 러시아 정부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민원 원광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집위원)는 “당시 일본은 명성황후 초상화를 뭔가 어색하게 그렸다”며 “러시아는 명성황후와 호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오뚝한 코에 이지적인 눈매와 계란형 얼굴 등 자신들과 친숙한 서구인의 이미지를 그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 끊이지 않는 사진·초상화 논쟁
명성황후의 사진과 초상화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광복 이후 국사교과서에 실렸던 명성황후 사진의 주인공이 ‘궁녀’라는 논란이 일어 2000년대 초반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학계에서는 ‘명성황후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프랑스 주간지 륄뤼스트라시옹(1895년 11월 2일자)에 실린 삽화 등 명성황후 추정 초상화와 사진 10장 안팎이 공개됐지만 현재까지 완전한 부정도, 긍정도 못하는 실정이다. 당시 명성황후를 만난 외교관이나 선교사 부인들의 증언이 명성황후의 외모를 추측하게 하고 있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노보예브레먀에 실린 세밀화는 구한말 한국에 머물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 등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다른 초상화와 유사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명성황후의 외모에 관한 글은 구한말 외국인들의 저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숍 여사는 저서 ‘코리아와 그 이웃나라들’에서 “1895년 1월 만난 명성황후는 40세가 넘은 나이였지만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며 “까만 머리색과 창백한 피부,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역시 저서 ‘상투 튼 사람들 사이에서의 15년’에서 “약간 창백하면서도 꽤 가는 용모에 뛰어나면서도 뚫어보는 듯한 눈을 가졌다”고 명성황후를 묘사했다. 명성황후를 직접 본 것으로 알려진 이폴리트 프랑댕 당시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는 저서 ‘한국에서’를 통해 “고종을 접견하러 갔다가 우연히 본 명성황후는 60cm 길이의 거대한 비녀를 머리에 꽂고 있었다”며 “매우 화려한 차림새였다”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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