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쾌히 써주셨던 혼배주례 부탁편지 그 사랑 못잊어 …”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2월 23일 02시 54분



“흔쾌히 써주셨던 혼배주례 부탁편지

그 사랑 못잊어 가시는 길 지켜봅니다”


■ 40년전 金추기경 친필편지 들고 美서 귀국한 정치호씨

‘강 군에게. 서울대교구 정 안젤모 군을 소개합니다. 정 군은 동경(東京)에 있는 약혼자와 혼배성사를 받게 되는데 누구에게 접촉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혼배주례 신부님이라든지, 좀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일 Roma로 떠나서 귀로에 아마 5월 10일경에 동경에 들를 것 같습니다. 1969. 4. 20 김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미사가 열린 22일, 경기 용인시 천주교 성직자 묘역.

추기경의 묘소 옆에 정치호 씨(69·사진)가 힘겹게 앉아 있었다. 추기경 선종 소식을 듣고 18일 미국에서 급하게 귀국한 정 씨는 한 장의 편지를 꺼내들고 40년 전 일을 회상했다.

1965년 서울 명동성당의 신자였던 정 씨는 주일대사관 직원으로 발령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4년 뒤 일본에서 약혼녀와 결혼을 하려던 김 씨는 가톨릭 혼배미사를 맡아줄 신부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잠시 귀국한 정 씨는 추기경을 만나 사연을 설명했다. 추기경은 그 자리에서 일본에 있던 강우일 신부에게 혼배미사 주례신부를 추천해 달라는 편지를 직접 써주었다.

‘강 군에게’로 시작하는 한 장의 편지가 바로 그것. 편지 속 강 군은 20일 장례미사 때 고별사를 읽었던 강우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제주교구 주교)이다.

“저는 추기경님과 친한 관계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신자였는데. 혹시나 싶어서 말을 꺼냈는데 너무나 흔쾌히 써 주시더군요.” 정 씨는 이 편지를 강 주교에게 전달했고 그 덕분에 무사히 혼배성사를 치를 수 있었다.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던 정 씨가 추기경을 다시 만난 것은 2004년. 김 추기경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본당을 방문했을 때였다.

“고이 간직해 온 편지를 추기경님께 보여드렸더니 ‘그런 일이 있었어요?’라며 조용히 웃기만 하셨습니다.”

그는 미사 내내 눈시울을 붉혔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직접 지켜봤지만 묘소에서 인사를 드리지 못하면 미국으로 못 돌아갈 것 같았어요. 추기경님, 고맙습니다.”

용인=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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