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우사 김규식 사망

  • 입력 2005년 12월 10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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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겠다. 좌우합작도 미국사람 장단에 춤추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남의 장단에 출 것이 아니라 우리 장단에 춤추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축배를 들자.”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백범 김구(白凡 金九)와 함께 평양을 방문한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은 김일성(金日成)이 베푼 초대연에서 이 같은 인사말을 했다. 광복 정국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우사는 좌우익 연립정부나 중도파 정부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그러나 ‘우리 장단에 춤추자’는 우사의 꿈은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들어서고 냉전이라는 냉혹한 국제현실 앞에서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순간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6·25전쟁이 나자 피란을 가지 못한 채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납북됐다. 그는 유엔군의 공세에 밀려 평안북도 만포 부근 압록강 한 귀퉁이까지 끌려갔다가 1950년 12월 10일 병세가 악화되면서 69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구한말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우리의 역사를 거친 우사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였다.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이 조선과 일본 간의 부정한 물품거래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가 집안이 몰락하면서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맡겨져 신교육을 받으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16세 때 미국 유학을 떠나 로녹대에서 수학한 뒤 7년 만에 귀국한 그는 YMCA에서 활동하면서 언더우드를 도와 새문안교회 예배당을 신축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경신학교 배재학교 등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자 그는 1913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전후(戰後) 문제 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한국대표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고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는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복귀해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조국의 현실은 좌우의 극단적 분열 대립과 찬탁 반탁투쟁으로 빚어진 혼란뿐이었다. 그는 이 와중에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온 힘을 쏟았으나 현실의 벽은 그의 꿈이 실현되기에는 너무나 높았다.

김동철 정치전문기자 skd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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