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논란 진행방식]일부 진보세력 이념도발로 체제 흔들기

  • 입력 2005년 10월 15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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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강정구(姜禎求) 교수 발언 파문이 처음 제기된 문제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당초 이 사건의 본질은 강 교수가 자극적인 용어와 자의적인 자료 인용을 통해 6·25전쟁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통념을 공격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에 대다수 국민이 개탄하는 상황에서 여권 핵심부와 천정배(千正培) 법무부 장관이 나서면서 ‘사상의 자유와 인신구속’이라는 원칙론적 차원의 이슈로 국면이 전환됐다. 그런데 이 같은 전개 양상은 지난 수년간 전개된 유사한 사례의 이념 논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정구 파문’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진행돼 온 체제 흔들기 논란들에 숨어 있는 특징을 분석해 본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논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논란의 핵심 주제들은 해방 전후사에 대한 평가 및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 북한에 대한 견해 차이, 한미관계에 대한 시각차 등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들은 외형상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먼저 좌파 성향의 진보 진영이나 여권 핵심부 내에서 ‘성역을 깨는 도발적 발언’이 돌출해 사회적 파문이 야기된다. 비난 여론이 들끓는 시점에 정부 여당이나 진보 진영에서 논점을 원칙론적 차원으로 돌려 버리는 발언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논쟁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다. 애초에 제기됐던 논점은 간곳없고 여권은 ‘사상의 자유’나 ‘역사적 대의’ 등의 명분으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거둔다.

‘찌르고 한 발 물러나 방패 뒤로 숨는’ 그 같은 패턴이 모종의 기획과 전략에 따른 것인지, 급진-보수 간의 작용 반작용에 의한 자연스러운 진행인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결과적으로 그간 한국 사회를 지탱해 온 통념 또는 합의사항으로 여겨졌던 많은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최근 강정구 교수와 관련한 논쟁이 대표적 사례다. 이 논쟁은 당초 6·25전쟁과 현대사에 대한 강 교수의 자극적 발언 때문에 시작됐다. 그러나 청와대와 여권이 강 교수의 인신 구속을 논점으로 잇따라 발언함으로써 사건은 “한국 사회에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으로 변화했다.

최홍재(崔弘在) 자유주의연대 조직국장은 “강 교수의 ‘만경대 발언’도 불구속 재판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 법원이 영장 발부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는데, 천정배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정부 여권이 나섬으로써 구속 문제를 핵심 이슈로 바꾸었다”며 “이 때문에 강 교수를 마치 ‘학문의 자유’를 위해 몸을 던진 순교자처럼 만들어 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박효종(朴孝鍾·정치학) 교수는 “강 교수 논쟁에 대해 학계가 자정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상태에서 천 장관 등 정부와 여권의 개입으로 ‘사상의 자유’ ‘국가보안법’ 등의 논쟁으로 흘러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현 정권 출범 이후 진보세력과 정부 여당 관계자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발언으로 파문이 빚어지면, 으레 ‘사상의 자유’ ‘역사의 대의’ ‘자주성’ 등의 원칙론을 내걸고 그 같은 원칙론의 방패 뒤로 숨는 양상이 뚜렷하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일련의 발언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발견된다.

2002년 4월 대통령 후보 시절에 노 대통령은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진 않겠다”는 등의 ‘과감한 발언’으로 반미 정서가 고조되는 분위기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 여권은 “대등하고 건설적인 한미관계를 추구하겠다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2003년 6월 13일 노 대통령은 일본에 가서 “한국에서도 공산당을 허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발언했으나 논란이 제기되자 여당에서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이며, 보편적이고 제도화된 선진국의 정당 제도를 말한 덕담”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위한 분위기 확대로 이어졌다.

한 보수단체 대표는 “진보세력은 선거만 가까워지면 우리 사회 대다수가 인정하는 것을 깨는 발언이나 행동을 해 놓고 곧 ‘원칙론’의 방패 뒤로 숨음으로써 당초 발언에 대한 9 대 1의 비판 여론을 6 대 4 정도로 바꾸고, 이를 통해 좌파세력 결집이라는 정치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커뮤니케이션 학자는 현재의 주류 급진세력이 의제를 설정하는 패턴에 대해 “상대와 의견 차이가 클 경우 의도적으로 충격적인 협상조건을 내건 뒤 궁극적으로는 그 중간쯤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전형적인 협상 방식”이라고 분석했다. 어떤 충격도 심리적으로 처음에 받았던 강도와 동일한 수위의 충격이 유지되지는 않기 때문에 중간쯤에서의 협상이 이뤄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학자는 “충격 던지기 식 발언과 중간쯤에서의 여론 소멸의 반복을 통해 현 정부 출범 이후 국민 전체의 정치사상적 스펙트럼은 시나브로 좌측으로 이동해 왔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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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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