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중년여자들]“뻔뻔하다고…?” 아줌마 아픔 아는가

  • 입력 2005년 9월 12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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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이가영(가명·48) 씨는 남편이 ‘몸짱 아줌마’ 얘기를 꺼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살찐 미련퉁이’라고 비아냥거릴 때는 행주를 확 던져버리고 싶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쏘아붙인다. “남은 음식 버릴 수 없어 다 긁어먹었어. 아이 둘 낳았더니 25kg이나 불었더라.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돈이라도 주면서 다이어트하라고 그래 봐라.” 말은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아닌 게 아니라 출렁거리는 뱃살이 부담스럽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누가 알아주나? 나중에 남편이나 아이들에게서 찬밥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7년차 주부 김영미(가명·38) 씨는 주변에서 ‘남편을 키웠다’는 말을 듣는다. 가난한 대학 강사를 만나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다. 남편은 그 덕에 조교수, 부교수로 승승장구했다.

형편이 좀 나아지면서 김 씨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그러자 남편의 시선은 싸늘해졌다. 자신의 월급은 연구를 위해 써야 하는데 왜 직장을 관뒀느냐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건만 김 씨는 요즘 자신의 삶과 결혼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온 한국의 중년 여성들. 그러나 사회는 이들에게 ‘뻔뻔한 아줌마’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었다.

각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이 눈부시다고 하지만 평범한 여성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남의 일일 뿐이다. 무심한 남편, 까다로운 시댁, 엄마를 하녀 부리듯 하는 아이들에게 짓눌려 주부들은 가슴앓이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명절이 가까워지면 주부의 스트레스는 최고조에 이른다. ‘남자들의 명절, 여자들의 노동절’이란 말이 나온다. 명절이 지나면 병의원 정신과를 찾는 중년 여성은 평소의 2, 3배에 이른다. 연세대 신경정신과 민성길(閔聖吉) 교수는 “‘화병(火病)’이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라며 “특히 중년 여성의 화병은 일종의 분노장애”라고 말했다. 남편, 시댁, 아이들에게서 비롯되는 응어리를 켜켜이 쌓다 보니까 불면증이나 가슴답답증 등 신체적 증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중년 여성 사이에서 결혼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증가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로 본 여성의 삶’에 따르면 40대 여성에게서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이란 의견이 1998년 72.7%에서 2002년 59.7%로 뚝 떨어졌다. 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의견은 24.7%에서 36.0%로 올랐다.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과 회의는 자신감 상실로 귀결된다. 본보 의뢰로 여성전문사이트 드림미즈에서 ‘어떨 때 전업주부란 사실이 싫은가’에 대한 설문을 실시한 결과 53.7%가 ‘스스로 도태되는 느낌이 들 때’라고 대답했다. 이어 ‘남편이 자신을 무시할 때’ 22.4%, ‘잘나가는 친구들을 볼 때’가 10.4%로 나타났다.

대화전문가 이정숙(李貞淑) 씨는 “주부는 하는 일이 없다는 인식이 중년 여성을 가장 힘들게 한다”며 “남편부터 아내를 귀하게 여기려는 인식의 변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한경혜(韓慶惠·가족아동학) 교수는 “남성은 나이가 들면서 소극적으로 변하는 데 비해 여성은 생물학적, 사회적 이유로 더욱 적극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며 “중년 여성들이 이러한 적극성을 긍정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가족은 물론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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