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푸이의 스승, 中 왕궈웨이를 만난다

  • 입력 2005년 7월 2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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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 지식인 중에서 가장 방대한 지식체계를 세웠던 왕궈웨이(王國維·1877∼1927·사진)의 생애를 조명한 ‘왕국유 평전’(영남대출판부)이 국내에서 처음 출간됐다.

왕궈웨이는 청조 고증학의 계승자이면서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을 중국에 소개한 신학문 연구가였다. 그가 남긴 60여 종의 저서는 중국의 철학, 미학, 문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갑골학, 금석학 분야에서 모두 고전으로 남아있다. 량치차오(梁啓超), 루쉰(魯迅), 궈모뤄(郭沫若) 등이 그를 중국 근대가 낳은 천재로 꼽았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한족 출신이면서도 변발을 고집하며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스승으로 청조의 부활을 꿈꾸다 장제스(蔣介石)의 북벌군이 베이징(北京) 점령에 나서자 이화원의 연못에 투신자살했다는 점에서 결정적 약점을 갖고 있다.

“반혁명가라는 이유로 중국에서도 한동안 그는 봉인된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개혁 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복권됐습니다. 한국에서 그의 평가는 소설가 이태준이 ‘해방전후’에서 묘사한 대로 ‘구체제에 집착한 보수주의자’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습니다.”

1996년 국내 최초로 왕궈웨이에 대한 박사논문을 발표하고 이번에 평전을 펴낸 류창교 숙명여대 초빙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류 교수는 평전을 펴내기 위해 왕궈웨이의 고향인 저장(浙江) 성 하이닝(海寧)부터 그가 숨진 베이징 이화원까지 꼼꼼하게 현장을 답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책에 실린 사진 대부분도 류 교수가 찍은 것들이다.

“왕궈웨이야말로 동서고금의 접점에 있던 학자였으며 그 접점을 가장 넓고 깊게 그리고 독창적으로 개척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자살을 두고 현실감각의 결여를 말하지만 그가 학문의 목적을 철저히 ‘쓸모없음의 쓸모있음(無用之用)’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의 성격과 부합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왕국유 평전’은 쇼펜하우어에 심취한 염세주의자로 사랑했던 첫 아내와 사별, 장남과 사별, 평생지기였던 뤄전위(羅振玉)와 결별 등 그의 비극적 생애와 대비되는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요약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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