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공지영]왜 우린 가족을 찾아가는가

  • 입력 2005년 2월 6일 17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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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무엇인지, 가족이 소중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가끔 의문을 품어 본다. 어찌 생각해 보면 가족만큼 서로에게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변화하려는 상대방의 노력을 불신하는 관계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신과나 가지가지 상담소가 그토록 붐비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낯선 타인에게 해 주었다면 칭찬을 받았을 친절과 봉사도 가족 내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며, 타인이 내게 했다면 며칠 기분 나쁘고 말았을 일도 가족이 한 것이면 대개 오래 기억된다. 가끔씩 며느리들끼리 모여 “내가 우리 시부모에게 하듯 이웃 사람에게 했다면 아마 표창장이라도 받았을 거야”라는 일리 있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책에서 기발한 발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외박과 늦은 귀가를 밥 먹듯이 하면서 늘 거짓말로 일관하는 남편을 둔 부인에게 주는 충고 한마디. “거짓말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악을 왜 당신의 남편만은 피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하는 질문이었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

우리 나이쯤 되면 입만 열면 몸이 아프다고 말을 꺼내는 부모를 한 사람쯤 가지고 있다. 목소리만 들어도 싫어서 의무감이 아니라면 전화를 걸지 않을 가족도 한 사람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발상을 적용시켜보면 사실 문제가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왜 우리 부모는 늘 건강하게 살며 끊임없이 나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든가, ‘왜 우리 며느리는 요즘의 다른 며느리들과는 달리 전통적인 효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든가, ‘왜 수많은 문제 청소년이 있어도 내 자식만은 무조건 순종하는 아이라야 하는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은 내게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가족만큼 나를 ‘봐준’ 사람은 없다. 그 역사로 보나 그 빈도로 보나 실은 내게 고통을 준 일보다 더 많은 용서를 해 준 사람들이 그들이다.

늦게야 철이 드는지 요즘은 ‘나쁜 사람’이라든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나쁜 점과 좋은 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 간다. 거꾸로 나를 두고 좋은 사람이니 나쁜 사람이니 하는 말에도 너그러워진다.

누구도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봐주니까’ 산다는 것,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오리까’가 되는 것이다. 그러자 기독교에서 왜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갔다. 투덜거리는 어머니와 소리 지르는 아버지, 기어이 빈둥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들도 실은 끊임없이 판단하고 불평하는 나를 봐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본다.

▼무조건 ‘봐주는’ 사람들▼

이 험난하고 냉혹한 세상에 가족이 정말 필요한 이유는 서로가 ‘봐주는’ 사람들이어서 그렇다는 것. 용서받아 본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고 사랑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는데,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것이 너무 거창하다면 ‘봐주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일단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내 뜻대로 법률을 만들고 집행관이 되어 ‘위반 딱지’를 끝없이 발급하지 않는 것, 그게 가족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명절날마다 험한 길을 달려가 그들과 만나는 거라고. 그리고 그건 비록 작은 의미의 가족에게만 해야 할 일은 아닐 것이다.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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