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책벌레들의 초상

  • 입력 2003년 8월 22일 17시 36분


◇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리처드 부스 지음 이은선 옮김/416쪽 1만5000원 씨앗을 뿌리는 사람

얼마 전 본 영화에 사람들이 모두 책이 되어버린 마을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각자 한 권의 책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줄줄 읽어준다. 영화를 보고 나와 잠시 ‘책이 된다면 난 무슨 책이 될까’ 생각해 보았다. 책이 되고 싶다는 욕망까지는 아니지만 엄청난 책 더미 속에 푹 파묻히고 싶다는 욕망은 가끔 느낀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고풍스러운 성 전체가 책방이고, 그림같이 펼쳐진 푸른 잔디 위에도 책들로 가득한 책장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한 폭의 사진이 절로 떠오른다. 수많은 욕심 중에서도 ‘책탐’을 최고로 치는 책벌레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려보았을 상상이지만, 언젠가 보았던 영국 웨일스의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의 사진은 내게 영원한 책벌레의 이상향으로 뇌리에 박혀 있다.

이 책은 1962년 퇴락한 작은 마을 헤이온와이에서 헌책방을 시작해 이곳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헌책방 마을로 바꾸어 놓은 리처드 부스의 자서전이다. 리처드 부스는 옥스퍼드대 졸업 후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책 읽는 사람이라곤 없는 시골 마을에 헌책방을 차린다. 이 책은 그 괴짜 헌책방 주인이 평생 동안 책을 찾아 각국을 떠도는 집념의 ‘오디세이아’이자 헌책방에 관한 생생한 보고서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그의 유쾌한 책 사냥 여행에 동참하는 흥분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괴짜들의 책 이야기에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있다. 평생 40km에 이르는 책장을 만든 목수, ‘개아범’으로 불리는 애견도서 전문수집가, 전집과 정기간행물의 ‘1권’만 모으는 애서가, 초판본이나 희귀본에 집착하는 ‘007’의 작가 이언 플레밍 등의 일화에는 우리도 흔히 볼 수 있는 책벌레들의 초상이 겹쳐져 있다.

부스는 당국의 관료주의와 무분별한 개발정책에 맞선 ‘문화 지킴이’이기도 했다. 마을 독립을 선포해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전 세계 ‘헌책방 제국 황제’로 추대되는 등의 해프닝들을 읽는 내내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는 것은, ‘오래된 종이뭉치’가 아닌 지식과 문화의 보고로서 헌책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그의 노력과 애정에 대한 진심 어린 경의 때문이다. 이제 그의 자서전이 출판됨으로써 소수의 마니아 문화로만 치부되던 헌책의 역사도 조금씩 나름의 두께를 지녀가게 되었다. 더구나 그 두께를 더욱 확장해갈 ‘책에 관한 책’ 시리즈의 첫째 권이라니 이제부터 책벌레들은 마냥 신이 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책 뒷장에 새겨진 우리 헌책방 주인들의 목소리다. 청계천 복원공사로 오랫동안 우리 마음의 ‘헤이온와이’였던 청계천 헌책방가의 운명이 위기에 처한 현실. ‘헤이온와이’는 아직 먼 나라 얘기지만 책을 살리는 것은 역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책이 각 가정에 필수적인 ‘가구’가 되는 그날까지 돌격 앞으로!

조희봉 독서칼럼니스트·‘전작주의자의 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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