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현장칼럼]모의 화재상황 체험…

  • 입력 2003년 2월 27일 17시 13분


코멘트
24일 경기 용인시 한국소방검정공사의 대형 소화시험장에서 모의 화재 상황을 체험중인 이승재기자. 휘발유가 타며 만들어진 연기가 시험장 내부 천장을 뒤덮은 후 벽을 타고 흘러 내려오며 층을 만들고 있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24일 경기 용인시 한국소방검정공사의 대형 소화시험장에서 모의 화재 상황을 체험중인 이승재기자. 휘발유가 타며 만들어진 연기가 시험장 내부 천장을 뒤덮은 후 벽을 타고 흘러 내려오며 층을 만들고 있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지하공간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유독가스가 사람보다 먼저 출입구를 찾는다고 한다. 더 많은 산소를 찾아 불길이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덮쳐오는 검은 연기에 당황한 피해자들은 방향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거나 유독가스에 질식하기 쉽다. 화재가 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불길의 정반대 방향으로 뛰어가지만, 침착하게 판단한다면 뜻밖에 화염을 피할 비교적 안전한 장소가 있을 수도 있다.

화염과 유독가스가 만드는 정신적 신체적 불안과 공포와 위협, 그 속에서 어떤 자구책을 취할 수 있을까. 기자는 24일 경기 용인시 한국소방검정공사에서 공사 연구부와 시험부의 도움을 얻어 휘발유를 사용한 모의 화재 상황 체험에 나섰다.

● 유독가스

가로 세로 각 5.5m, 높이 3.8m의 밀폐공간(가스계 소화설비 시험모형) 한쪽에 휘발유 10ℓ로 불을 냈다. 내열성 소재인 아라미드로 만든 특수 방화복을 입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30초가 지나자 안경 렌즈의 양 모퉁이에서부터 서서히 연기가 내려와 깔리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따가웠다. 호흡곤란은 서서히 오지 않고 일순간 들이닥쳤다. 숨을 들이마심에 따라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면서 권투 글러브를 낀 주먹으로 강하게 맞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앉은 자세를 취하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으니 한결 나았다. 그 상태에서 코로만, 입으로만, 코와 입으로 번갈아 호흡하는 등 몇 가지 숨쉬기 방식을 시도해 보았으나 차이는 없었다. 다만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보다는 잘게 나눠 쉬는 것이 한결 편안했다.

1분 30초가 채 되기 전 내부가 새까만 연기로 가득 찼다.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출입문마저 눈앞에서 까맣게 사라졌다. 호흡도 곤란했지만, 더 큰 불안감은 앞이 보이지 않는 데서 왔다. ‘혹시 저 출입문을 나중에 찾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내 위치를 잊지 않고 판단력을 잃지 않기 위해 몸을 화염이 있는 장소의 반대쪽 벽에 밀착했다.

목구멍이 쓰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엎드려 코를 바닥 바로 위 2㎝ 남짓한 높이까지 내리깔고 얼굴을 땅에 박다시피 하자 호흡이 한결 수월해졌다. 상대적으로 아주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수건에 침을 뱉어 적신 후 입과 코에 갖다대니 훨씬 시원스레 느껴졌다.

각종 플라스틱이 타면서 나오는 유독가스 속의 산(酸) 성분은 물에 녹기 때문에 물에 적신 수건을 사용하면 호흡이 한결 쉬워진다. 물이 없을 경우 침이나 오줌도 비슷한 효과를 낸다. 또 유독가스는 뜨겁고 가볍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고, 불은 통상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을 통해 번져나가므로 몸을 낮추면 가스나 화염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한국소방검정공사 시험부 박영기 대리는 “화재로 유독가스가 발생했을 때는 숨을 쉬지 않고 밖으로 빠져나가겠다는 생각으로 호흡을 최대한 참아야 한다”고 했다. 화재로 인한 인명 피해는 대부분 불에 타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질식함으로써 발생한다. 유독가스는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이마시면 머리가 띵해지면서 판단력과 방향감각을 상실, 심하면 밖으로 탈출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한 채 망연자실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당황할수록 호흡은 가빠지며 더 빨리 질식할 가능성이 높다.

화재 발생 시 아직 유독가스가 덮쳐오기 전이라면 복식호흡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몸이 이완되고 긴장이 풀리며 쉽게 흥분하지 않게 된다. 복식호흡은 평소 연습이 필요하다. 또 정신이 혼미해 올 때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에게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생존 의지를 잃지 않도록 한다. 평소 ‘나도 사고를 당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어떻게 행동하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재가 난 지하공간에 구조를 위해 방독면만을 쓰고 진입하는 것도 위험하다. 방독면은 일정 시간(국민보급형은 5분가량, 군용은 15분가량)동안 유해가스 흡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산소 농도가 떨어진 곳에서는 방독면을 썼다고 해도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기 쉽다. 유독가스는 눈에 보이지만 산소가 희박해진 상황은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2분 30초가 지나자 눈과 코와 귀와 입이 모두 막힌 것 같은 압박감이 엄습해 왔다. 손수건이 다시 바짝 말랐다. 계속 침을 뱉어 적셔야 했다. 입안이 검은 분진으로 가득 차 잇몸이 껄끄럽고 혀가 잘 움직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서도 서서히 열기가 느껴졌다. 실험실 밖에서 소방검정공사 관계자들이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괜찮으냐”며 연방 출입문을 두드려댔다. 그 소리로 인해 출입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하 노래방처럼 밀폐된 공간의 경우 사람들은 화재 발생 시 가장 먼저 움직이는 사람의 탈출방향을 무조건 따르는 ‘추종성’을 보이기 때문에 이 ‘첫 사람’의 움직임이 나머지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탈출 시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데일 만큼 뜨겁다면 그 문은 열어서는 안 된다. 손잡이가 뜨겁다는 것은 손잡이 반대쪽의 공간이 이미 뜨거워져 공기가 팽창해 있음을 뜻한다.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산소가 공급되면서 폭발한다.

3분이 지날 무렵 실험장을 빠져나왔다. 머리가 가려워 긁으니 손톱 밑에 새까만 기름 때가 끼었다.

● 화염

가로 세로 각 36m, 높이 18m의 초대형 소화시험장 한가운데 휘발유 200ℓ를 놓고 불을 붙였다. 불꽃은 순식간에 13m 높이까지 치솟아 올랐다. 30초가량이 지나자 새까만 연기가 천장에 버섯구름처럼 모였다. 연기가 사방의 벽을 타고 흘러 내려오며 층을 만들기 시작했다. 웬만한 격납고 규모의 시험장 내부가 연기로 가득 차는 데는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섭씨 1000도 이상의 화염을 향해 접근해 보았다. 방화복을 입고도 10m 내로 근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화염에서 15m가량 떨어진 시험장내 비닐 천막이 끈적끈적해지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복사열은 마치 화살처럼 얼굴 구석구석에 와 박히는 것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특수 방화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손바닥으로 가린 공간만큼은 마술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불은 불꽃의 형태로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게 성큼성큼 ‘뛰어’가기도 한다. 이를 소방관계자들은 “불이 날아다닌다”고 한다. 화염에서 나온 엄청난 복사열이 멀리 떨어진 사물이나 공간을 발화점(發火點) 이상으로 가열시켜 스스로 불이 붙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열 기류를 따라 각종 가연성 가스가 이동, 폭발하기도 한다.

화재를 이해하는 데에는 발화점이 중요하다. 식용유의 경우 섭씨 380도(발화점)가 넘으면 불이 붙는다. 집에서 조리 시 식용유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은 수시로 집어넣는 음식이 기름의 온도를 낮추기 때문이다. 식용유가 장시간 가열돼 불이 났을 경우 물을 부으면 위험하다. 식용유에 불이 붙었다는 것은 온도가 최소 380도 이상 된다는 것인데, 여기에 물을 부으면 끓는 점이 100도인 물은 순간적으로 폭발하듯이 기화하기 때문에 여기에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식용유 속에 차가운 야채를 집어넣어 온도를 발화점 이하로 낮추는 것이 현명한 진화법이다.

화염으로부터 10m가량 떨어진 지점에 선 지 3분이 넘어서자 플라스틱 안경 다리가 느슨해지며 안경테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쑤셔서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둥글게 말아 최대한 복사열에 노출되는 부위를 줄였으나 얼굴의 따끔거림은 계속됐다.

목재로 된 구조물을 기준으로 할 때 불이 난 후 평균 2분40초가 지나는 순간부터 불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이 시간이 되기 전 불을 끄는 것을 ‘초기진압’이라 한다. 한국소방검정공사 관계자들은 “아주 작은 소화기라도 지하철 탑승객들의 눈 높이인 창 사이나 광고판 옆에 배치돼 있었더라면 이번 대구지하철 화재는 초기진압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일반인들이 ‘훈련’보다는 ‘본능’에 이끌려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재 방법이라는 것. 화재가 발생했을 때 바로 눈앞에 소화기가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진화(鎭火)보다는 탈출을 선택한다.

실험은 시험장이 연기로 까맣게 뒤덮여 앞뒤를 구분하기 어렵게 된 3분30초 무렵 종료됐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