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현장칼럼]"다른 놈과 즐기면서…”

  • 입력 2003년 2월 20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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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제일신경정신과 김진세 박사가 18일 한 환자를 대상으로 로샤 테스트(카드에 담긴 잉크반점에 대해 떠오르는 느낌을 이야기함으로써 심리상태가 드러나도록 하는 검사)를 하고 있다. ”카드 내용과 해석 방법이 자세히 알려지면 환자들이 이를 미리 외워 검사 과정에서 속일 수 있다”는 한국임상심리학회의 우려에 따라 사진에 나타난 카드 관련 내용은 설명을 생략한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고려제일신경정신과 김진세 박사가 18일 한 환자를 대상으로 로샤 테스트(카드에 담긴 잉크반점에 대해 떠오르는 느낌을 이야기함으로써 심리상태가 드러나도록 하는 검사)를 하고 있다. ”카드 내용과 해석 방법이 자세히 알려지면 환자들이 이를 미리 외워 검사 과정에서 속일 수 있다”는 한국임상심리학회의 우려에 따라 사진에 나타난 카드 관련 내용은 설명을 생략한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지금도 남편이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36세 전업주부 A씨가 최근 김진세 고려제일신경정신과 원장을 찾아왔다. 동갑내기 남편(회사원) B씨의 의처증에 6년간 시달리다 우울증을 앓게 된 것. 남편은 직장에서도 대낮에 뛰쳐나와 아내가 다니는 한 문화센터 주변을 정탐했다. 또 밀가루를 현관에 뿌리고 출근하면서 어떤 ‘놈’이 집안을 들락거리는지 족적을 잡아내려 했다. 인터넷을 통해 정액검출 키트를 구입, 외출했다가 귀가한 아내의 팬티를 검사했다. 휴대전화 위치확인 서비스를 통해 회사에서 아내의 위치를 감시했다. 기초화장품을 제외한 색조화장품과 치마는 전부 내다 버렸다. 퇴근 후 문간을 들어서자마자 찬장을 열어 간장병을 확인하고는 “얼마나 다른 놈들에게 음식을 많이 해줬으면 상표가 너덜너덜해졌냐”며 다그쳤다. 아내의 칫솔모를 만지작거리며 얼마나 자주 이를 닦는지, 이 닦는 주기에 변화는 없는지를 확인했다.

A씨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이혼에 동의하지 않은 남편은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 뒤에도 의심이 계속되면 이혼에 동의한다’는 각서를 써 공증을 받았다. 그러고도 이날 신경정신과를 찾는 아내의 뒤를 밟았다. 이튿날 남편이 아내에게 이끌려 병원을 찾았다.

▽남편〓아내를 때린 건 사실이다. 잘못은 인정한다. 그러나 난 피해자다. 여자가 바람을 피우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의사〓어떻게 바람을 피웠나.

▽남편〓낮에 불시에 귀가해 보니 아내가 속옷 비슷한 걸 입고 있었다. 당신 같으면 눈이 뒤집히지 않겠느냐. 남자(문화센터 강사) 차를 타고 점심 먹으러 가는 것도 내 두 눈으로 목격하고 캠코더로 찍어놨다. 다 아는 상태에서 “점심에 학교에서 어디에 갔느냐”고 물으니 “친구들과 커피 마셨다”고 거짓말했다.

▽의사〓단 둘이 차에 탔나.

▽남편〓다른 아줌마들도 함께 탔다. 그러나 아내가 가장 히히덕거렸다.

▽의사〓얼마나 고통이 큰가.

▽남편〓무슨 수작이냐. 아내와 짜고 하는 건지 다 안다. 아내는 날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다른 놈과 달아날 작정이다. 바람피웠다는 결정적 메모를 해놓았다.

남편은 수첩을 제시했다. ‘오전 9시, 집에 전화했는데 없었다. 오전 11시에 전화 받았다. 2시간이 빈다. 확인했더니 아내는 10시에 집을 나갔다고 했다. 1시간이 빈다. 오후 2시에 전화했더니 ○○엄마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1시간 뒤 휴대전화로 전화했더니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남자 목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오후 10시, ○○엄마를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했더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못 만나느냐고 대들었다. 잘못한 게 없다면 반항할 이유가 없다. Oh, My God’이라고 메모돼 있었다.

카드에 담긴 잉크반점에 대해 떠오르는 느낌을 이야기함으로써 심리상태가 드러나도록 하는 로샤(Rorschach) 검사에서 남편은 한 카드(그림1)를 보고 “가면 같다. 얼굴에 쓰는 투구 같다. 하얀 눈이 나를 째려보는 것 같다”고 반응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박쥐나 나비’로 보는 것과는 달리 다소 ‘음모론’적이었다.

300여 개의 항목에 예, 아니오로 대답하는 다면적 인성검사(MMPI)에서 남편은 ‘나는 다른 사람 때문에 고생한다’거나 ‘누군가가 최면을 건 듯하다’는 등 비관적이고 현실회피적 반응을 보였다. 반면 ‘옳은 일이라면 상대가 으스대면서 청하더라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거나 ‘귀중한 물건을 내버려둠으로써 훔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사람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등 냉철하고 도덕적인 반응도 나타냈다.

사람을 그려보라고 주문했다. 남편은 남자를 그렸다(그림2). 남편은 “그냥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다”며 “남을 속이거나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의사는 남편이 △눈을 유난히 크게 그린 것에서 ‘의심 많음’을 △손을 그리지 않는 것에서 ‘타인과 어울리는 사교기술이 부족함’을 읽어냈다. 남편은 편집증(망상장애)이 있는 것으로 종합 판정됐다.

의처증 남편들은 연애시절부터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런 ‘냄새’에 오히려 사로잡힌다. B씨의 경우 연애시절 △하루수십 번 전화해 다정하게 위치를 묻거나 △늦게 귀가하면 집 앞에 기다리고 섰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걱정돼서 이렇게 달려왔다”고 하거나 △휴대전화를 사주면서 “이 전화는 우리만의 비밀이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꼭 받아라.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고 아내는 기억했다. 결혼 전 ‘자상’(“요즘 세상 무섭다. 밤에는 외출을 삼가라”)하던 남편은 결혼 직후 ‘보수적’(“나가지 말아라. 너를 위해서다”)으로 변했다가, 결국 ‘무섭게’(“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머리카락을 싹 밀어버리겠다”) 변했다.

의처증 남편들은 자녀에게 살갑게 대하고, 장인 장모 등 주변 식구를 빠짐없이 챙기는 등 일상생활에서는 정상적인 경우도 많다. 또 ‘외도하는 아내를 응징하리라’는 사명감에 빠져 스스로에게 도덕성을 강제하기 때문에 주변에 공손하고 교양 있게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아내는 더 고립된다. 남편은 아내의 외도 장면을 상상하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내를 괴롭히고 때린다. 그래서 의처증 남편들은 “내가 바로 피해자다” “모두 당신(아내)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는 말을 반복한다. ‘내가 아내를 섹스로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내는 반드시 바람을 피울 거야’하는 강박에 시달리기 때문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관계를 요구하기도 한다. 아내가 거부하면 “다른 놈과는 실컷 즐기면서…”하며, 아내가 응하면 “역시 밝히는군”하며 몰아세운다.

의사는 아내 A씨에게 ‘남편의 증세가 나아질 때까지 절대로 해서는 안될 행동’ 3가지를 일렀다. ①감정이 북받쳐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는 것(“그래, 당신 말이 다 맞아. 이제 됐어?” “그렇게 원한다면 나 실컷 바람 피우다 죽어버릴게”) ②대답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해 거짓말을 하는 것(“나 시장에 안 갔다니까”) ③괴로움 때문에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는 것이었다. 의사는 또 △남편에게 맞았을 때는 참지 말고 즉시 진단서를 끊고 문제삼을 것 △남편의 폭력으로 난장판이 된 집안을 치우지 말고 시댁식구를 불러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도록 해 남편을 ‘압박’할 것을 주문했다. 수 주 뒤.

▽남편〓직장 근무 중 연놈들이 함께 있는 모습이 떠올라 뛰쳐나왔다. 아내가 있는 문화센터로 달려갔다.

▽의사〓회사로 언제 돌아왔나.

▽남편〓오후 7시 무렵이었다. 상사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의사〓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면서 당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나.

▽남편〓직장생활도 조졌다. 인사고과도 최악이다. 퇴근 후 아내를 감시하려 바로 귀가하다보니 친구들도 멀어졌다.

▽의사〓경제적으로는.

▽남편〓심부름 센터에 미행을 의뢰하느라 수백 만원 깨졌다.

▽의사〓고 3때도 다른 여자를 걱정하다가 대학에 실패해 재수했다고 하지 않았나?

▽남편〓….

▽의사〓스스로 인생이 피곤한가.

▽남편〓그렇다. 난 피해자다.

의처(疑妻) 혹은 의부(疑婦)증은 망상장애 중 하나다. 망상장애에는 △과대형(‘나는 수퍼맨이다’) △색정형(‘저 사람은 나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질투형(‘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다’) △피해형(‘국정원 직원이 나를 죽이려 한다’) △신체형(‘내 코는 비뚤어졌다’) 등이 있는데 의처증은 이중 ‘질투형 망상장애’에 속한다. 아내의 한마디 말실수와 표정, 분 단위 행각을 모두 기억해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논리적인 ‘소설’을 쓰고 탐정 수준의 메모를 남기기 때문에 의사들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 시댁 및 친정 식구들을 불러 교차확인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지난해 이뤄진 이혼상담(4475건) 중 의처증에 의한 것은 5.5%로 2001년 4.0%에 비해 증가했다.

의사가 “당신의 생각은 모두 망상이다. 아내는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치료는 100% 실패다. 의처증 환자들은 절대로 자신에게 의처증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의사의 의도와 능력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환자의 주장에 긍정도(의심이 강화된다) 부정도(의사를 믿지 않게 된다) 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이끌며 환자와 라포(Rapport·환자가 의사를 믿으면서 갖게되는 치료적 동맹 상태)를 형성하는 것이 의사의 능력이다.

완치는 어렵다. 다만 아내를 의심하는 데서 발생하는 물질적 정신적 손실을 스스로 깨닫게 유도하면서, 도파민(망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뇌 신경전달물질) 생성을 억제하는 약을 처방한다. 아내가 “당신은 의처증”이라며 남편의 병원행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감기에 자주 걸리고 피곤해 보이니 안쓰럽다. 신경성인 것 같다. 감기 치료를 위해 병원에 함께 가보자”며 신경정신과를 자연스레 찾도록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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